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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한마디에 숨죽여야만 하는가?

<데스크칼럼> 파병안 논란 와중 슬쩍 확정된 3ㆍ27 정부 경제운용방향을 보며

결국 모든 것은 경제문제다. 경제가 어려우니 이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논리가 득세하면 다른 어떤 가치나 논리도 설 땅을 잃는다.

환경보호의 논리, 지역균형발전의 논리, 소득재분재의 논리, 시장 건전화를 위한 재벌.금융개혁의 논리, 모두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국가적 자존심, 평화의 세계여론도 내팽개쳐진다.

오로지 하나, 경제가 불안하면, 경제위기가 닥치면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구호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언제까지 이 경제논리의 덫에 갇혀 있어야 하나? 우리의 힘은, 우리의 수준이 여전히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先 경기회복, 後 개혁’의 경제운용방향 확정**

이라크 전쟁과 파병동의안 처리 문제로 뒤숭숭한 27일 정부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경제정책조정회의를 열어 새 정부 경제운용방향을 확정했다.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공장 건설을 막아 왔지만 이번에 대폭 완화됐다. 친환경적 설비도입 조건부이긴 하지만 상수원보호구역내 공장 증설도 허용됐다. 경유승용차 내수 판매가 2005년부터 허용됐다. 골프장 건설 허용면적도 대폭 늘렸다. 8천만원까지 비과세되는 주식형 간접투자상품도 신설된다.

금융계열분리 청구제, 금융기관 대주주 자격유지제 등의 과제도 거론은 됐다. 하지만 시행시기 등 일정조차 제시되지 않은 채 5월에 구성될 ‘산업자본.금융자본 분리 태스크포스팀’의 과제로 떠넘겨졌다.

한마디로 ‘선(先)경기회복, 후(後)개혁’이다. 반(反)환경적이다. 불(不)균형이다. 소득재분배에 역행하는 조세정책이다.

이 모든 것이 다 경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심리가 팽배하고, 실제 국민들의 체감경기도 바닥을 헤매고 있다. 전쟁 장기화와 유가 상승 압력, 수출 부진 등등 기다리고 있는 악재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별다른 논란도 없이 반환경, 불균형, 소득차별적 정책들이 당연한 듯 결정된다. 각종 개혁구상들은 뒤로 미뤄진다.

연일 전쟁소식으로 뒤범벅인 상황에서 슬그머니 확정되고, 즉각 시행에 들어간다. 그만큼 환경은 위협받을 것이고, 수도권 집중은 강화될 것이고, 부자들은 이자도 안내고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미국 지지, 파병 결정’도 따지고 보면 경제 때문**

우리 정부가 UN에서 앞장서 미국 편을 들고, 이라크 파병안을 내는 이유도 사실 따지고 보면 경제위기가 올까 두려워서다. ‘대등한 외교’, ‘한미관계의 재정립’을 외치던 노 대통령이 순식간에 이렇게 돌변한 것도 결국은 경제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국익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말했다. 북핵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한미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엔 경제가 있다.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퍼지고, 주한미군 철수설이 고조되면서 외국인투자자들이 불안해하고, 무디스 등 신용평가기관들이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지 모른다는 위협이 쏟아지자 미국의 북한 공격설, 주한미군 철수설 등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황급히 ‘미국 지지’를 선언하고, 파병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한반도문제는 평화적으로 풀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한마디를 끌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편을 들지 않고, 파병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곧바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거나 북한을 폭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들어맞아야 하고, 또 상황이 그렇게 조성되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위협과 협박, 위기 조성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폭격설’ ‘철수설’을 더 자주 언급하면서, 노무현 정부와의 불협화음을 더 자주 노출시키면서 신용평가기관, 미국 자본, 돈 가진 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이 힘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경제가 불안하고,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위협 앞에 다른 어떤 논리도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환경·분배·균형·명분’이 ‘경제’보다 우선하는 날 언제일까?**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성장제일주의’로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1백억불 수출, 1천불 국민소득’의 꿈으로 환경과 분배와 균형의 모든 가치들을 짓눌렀다. 60-70년대 개발연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전두환, 노태우의 80년대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국토가 병들고, 격차와 갈등은 심해졌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내세운 김영삼, 김대중 정부도 정치적 민주화는 진전시켰을지 모르지만 경제민주화, 환경가치 존중, 자주외교 등에서는 거의 나아지지 못했다. 경제가 좋아지면 조금 하는 척 하다가, ‘위기 조짐’이란 단 한마디 경고에 즉각 고개를 숙였다.

뭐니뭐니 해도 역시 경제였다. ‘우선 잘 살고 봐야 할 것 아니냐’는 논리를 우리는 단 한번도 꺽어보지 못했다.

환경의 논리란 다소 궁핍해지고, 살기 불편해지더라도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논리다. 분배와 균형의 논리란 좀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함께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길을 택하자는 논리다. 국가적 자존심을 찾고, 실리보다는 명분을 선택하자는 것은 손해 볼 것을 감수하고라도 떳떳하고 당당해지자는 주장이다.

이것이 진짜 개혁이고, 진보다.

손해 보고 희생되는 것 전혀 없는 개혁과 진보는 없다. 그러한 손해와 희생을 능히 감수할 수 있을 때 개혁과 진보는 가능해진다. 손해 볼 것을 미리 알고, 능히 감수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지느냐, 그 공감대의 폭이 얼마나 넓으냐의 문제다.

‘친환경적 개발’ ‘분배와 성장의 조화’ ‘균형발전’ 등의 구호는 어디까지나 구호이며 목표일뿐이다. 항상 현실은 그중 무엇이 우선이냐를 묻는다. 선택을 요구한다.

환경, 분배, 균형, 명분론이 경제보다 앞설 수 있는 날이 도대체 언제일까?

세상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도 아직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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