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원칙에 위배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외국 기업에게 제소를 당할 수도 있고, 가격이나 품질 경쟁에서 밀린다는 이유로 지역의 생산자를 고사시킬 수도 있다. 생산자든 소비자든 '돈을 더 많이 지불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돈이 없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그리는 이들에게 안타깝게도 꿈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종종 '꿈'으로 치부되는 '돈 없어도 살 수 있는 사회'를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역통화'를 실험하는 공동체들이다. 이자나 화폐 없이 공동체 내 주민들이 노동력과 물건을 직접 거래하는 방식의 지역통화는 이미 전세계에 2000~3000개 정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는 지역통화를 실험하는 각국의 공동체들을 소개한 글이 실렸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아해(필명) 씨는 글을 통해 "빈곤이 판을 치든, 인권이 무시당하든, 무엇이 어떻게 되더라도 끊임없이 이윤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유혹하는 자본에게 지역통화는 '네가 답이 아니야. 우린 너 없이도 인간답게 살 수 있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편집자>
지역통화! 화폐 없이 거래를?
만약 내 손에 돈이 없어도 필요한 물건을 얻거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면? 돈으로 투기를 하지 못하도록 이자가 붙지 않는다면? 그래서 돈을 쌓아놓고 있을 이유가 없다면? 돈이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되어 지역 내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돈이 없기 때문에 빈곤해지고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되는 상황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러한 체계는 '지역통화'라는 이름으로 이미 전 세계에 2000~3000개 정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과 '통화'라는 비교적 쉬운 낱말들로 이루어진 '지역통화'.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언뜻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 듯 하다가도, 무언가 명확히 잡히는 것 없이 애매모호해진다. 도대체 지역통화란 무엇일까? 지역통화는 빈곤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레츠, 대표적인 지역통화
지역통화의 대표적인 예로서 자주 언급되는 '레츠'(LETS,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는, 1983년에 캐나다 밴쿠버섬의 코목스 밸리에서 실업을 경험했던 마이클 린턴이 빈곤을 탈피하기 위해 시작한 지역통화다. 레츠는 녹색달러(Green Dollar)라는 가상의 화폐를 매개로 각 개인의 계정에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씨의 잔고가 (+)100녹색달러이고 이씨의 잔고가 (+)10녹색달러였는데, 이씨가 김씨에게 20녹색달러를 주고 꽃 10송이를 샀다고 하자. 그러면, 레츠사무소에서는 김씨의 계정을 (+)120녹색달러로, 이씨의 계정은 (-)10녹색달러로 조정한다. 그 후 잔고가 (-)20녹색달러인 박씨의 아이를 한나절 동안 돌봐 준 이씨가 박씨로부터 30녹색달러를 받았다면, 박씨의 계정은 (-)50녹색달러가 되고 이씨의 계정은 (+)20녹색달러가 된다.
적자도 가능하고 이자도 없다
레츠의 예에서 보듯이, 지역통화는 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적자 계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징은 당장 내 손에 '돈'이 없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동체 내에서 구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빈곤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또한 지역통화에는 이자의 개념도 없다. 적자 계정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이자가 없다는 사실은 자신의 계정에 '돈'을 쌓아둘 필요를 아예 없애 버린다. 지역통화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기는 일도 없다. 돈 많은 사람만 투기로 돈을 벌고 돈 없는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지역통화와는 무관하다. 부의 축적수단도 가치증식의 수단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지역통화를 기존 화폐와 다른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지점이다.
지역 내 거래를 활성화시킨다
지역통화는 특정 지역 내에서만 사용 가능하므로, 돈을 지역 내에 머물게 하고 지역에 재투자하게 함으로써 지역 내의 거래를 활성화시킨다. 이는 외부의 필요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 구성원의 실제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알맞게 소비하는 공동체 구조의 형성을 촉진시킨다. 동남아시아 최초의 지역화폐인 '비아 쿠드 첨'을 보자. 비아는 타일랜드 북동부 지역 쿠드 첨 마을과 인근 6개 마을에서만 사용된다.
"내가 비아를 가지고 방콕행 버스표를 살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라고 한 방문객이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비아 쿠드 첨 실행위원이 답변한 내용은 지역통화의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바로 그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지역 외부에서 사는 물품의 수를 줄이고, 지역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지원하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병원에 가는 등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데 계속해서 바트(태국 화폐)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의 산물인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서는 비아로 교환함으로써 우리의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통화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다
지역통화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실제 재화나 서비스가 거래되는 바로 그 순간마다 이용자에 의해 발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중앙은행에 의해 독점적으로 발행되면서 실제 재화나 서비스의 거래와 상관없이 이자 놀이나 투기만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기존 화폐의 폐단을 지역통화에서는 찾기 힘들다. 레츠의 경우를 보면, 녹색달러가 개인들 사이의 거래 시에만 발생하여 지역통화의 흐름이 실제 거래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국 뉴욕주 이사카 지역의 지역통화는 레츠와는 다소 다르다. 여기서는 레츠의 대차대조표 대신 '이사카아워'라는 실제 화폐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사카아워는 이사카아워 준비위원회에서 발행한다. 이사카아워 준비위원회는 화폐의 발행 주체가 이용자 개개인이 아닌 제3의 기관이라는 점에서 기존 중앙은행의 지역판 정도로 폄하될 수도 있다. 하지만 통화의 발행, 대출 등의 중요한 사항들을 매달 2차례 열리는 비공식 만찬을 통해 결정하는 이사카아워 준비위원회는, 민주적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기존 중앙은행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사람들의 관계와 공동체를 강화한다
돈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돈이 되면서 돈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기존 화폐 체계 아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축적하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거래하면서 화폐의 정확한 이동을 중시한다. 결국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는, 내가 다른 사람 덕에 필요한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얻은 것으로 인식된다. 결국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이해타산적으로 만들고 공동체를 전혀 강화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역통화는 기존 화폐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다. 지역통화 아래서는 돈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화폐의 지불보다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 자체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지역통화의 흑자(+) 계정은 내가 공동체에 그만큼의 기여를 했다는 뜻이고, 적자(-)계정은 공동체로부터 그만큼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지역통화는 사람들 간의 거래를 상호 존중과 친절에 근거한 공동체적 교환으로 만드는 것이다.
빈곤없는 세상을 만드는 지역통화의 가능성
일할 능력은 있지만 돈을 버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빈곤해진 사람은 지역통화를 매개로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재화를 얻을 수 있다. 지역통화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 내에서는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일하는 당사자들이 빈곤에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역통화를 기반으로 한 자립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가 빈곤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안전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복원하고 자립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바로 이 사실에 빈곤없는 세상을 만드는 지역통화의 가능성이 있다. 빈곤이 판을 치든, 인권이 무시당하든, 무엇이 어떻게 되더라도 끊임없이 이윤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유혹하는 자본에게 지역통화는 "네가 답이 아니야. 우린 너 없이도 인간답게 살 수 있어"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22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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