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개혁과 변화의 강풍이 몰아치고 있다." 1993년 3월 25일 한 일간지에 실린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한달'이란 제목의 기사 첫 문장이다.
***YS, DJ의 취임 한달**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개방, 청와대 소유 안가(安家) 등 12곳 개방 및 철거, 취임 11일만에 첫 개각사태까지 몰고 온 파격적 조각,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와 정.관계 줄사퇴로 이어지는 '후(後) 폭풍', 안기부 기구 축소, 기무사와 청와대 경호실 위상 재정립, '하나회 해체'로 이어지는 국방부 특명검열단의 특별감사 착수, 경제 규제 완화와 금리 인하, 그리고 4만2천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면조치까지. 당시 문민정부 한달을 정리하는 기사들에 단골로 등장한 메뉴들이다.
한마디로 군사정권이 남긴 권위주의의 유산을 척결하는 파격적 조치들이 한달을 지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는 '당선 한달'과 '취임 한달'을 동시에 짚어봐야 한다. 긴박한 IMF 구제금융 사태 극복을 위해 당선 직후부터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당선 한달'. 미 대통령, 일 총리, IMF 총재, IBRD 총재, ADB 총재 등과의 전화외교, 이를 통해 IMF와 G7의 1백억달러 조기 지원 결정, 상호지급보증금지, 결합재무제표 조기도입 추진 등 재벌개혁 시동, 노사정위원회 출범과 정리해고 합의 도출 등이 이뤄졌다.
'취임 한달'. 정부수립 후 최대 규모의 정부조직개편, 경제대책조정회의 신설,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 외국인 토지소유 문제 등 과감한 규제혁파 등이 이뤄졌다.
두 달을 종합해 보자면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위기상황의 급한 불을 꺼가면서 정부, 재계의 개혁과 노동계에 대한 고통분담 요구가 동시에 추진된 것이다. 경제사회 분야 전면 개혁의 착수다. 반면 총리인준안 처리에서 시작된 국회 파행은 북풍문제까지 겹치면서 한층 더 꼬였다. '경제 숨통, 정치 발목'이 공통된 평가였다.
***노무현 정부 한달, '논의 무성, 실적 별무'**
YS, DJ 정권 출범 한달과 노무현 정부 출범 한달은 어떻게 비교될까?
가장 큰 특징은 '논의 무성, 실적 별무'라 하겠다. 나쁘게 평하자면 '말만 많고 해 놓은 건 없는 한달'이며, 좋게 보자면 '본격적 개혁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 정비'다.
YS가 집권한 1993년, DJ가 집권한 1998년과 지금을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93, 98년에 비해 2003년 취임 한달 사이 구체적으로 시행에 들어간 실적이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전임 정부들에서 취임 직후 늦어도 일주일 정도 사이에 모두 완료되었던 조각과 주요 보직에 대한 인사조치가 노무현 정부에서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가장 많은 논란이 이 대목에서 벌어졌다.
행자.법무.문광부 장관 등 몇몇 자리에 파격적 인사가 이뤄졌다. 검찰에서도 서열파괴형 인사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정도 '파격'은 전임 정부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게다가 이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새로 선임된 어떤 장관도 아직은 분명한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없다. 아직 부처내 인사 조차 마무리되지 못한 단계다.
왜일까? 지난해 선거 과정에선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며 당선되면 '질풍노도의 시기'를 예고했던 노무현 정부가 출범 한달을 이처럼 '아무 일 없이' 보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전쟁 때문? 참여와 토론 때문?**
첫째 미국의 이라크 공격, 북핵문제 등으로 꼬인 국제정세, 이로 인한 경제불안이 원인일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개혁성'의 상징은 한미관계, 남북문제, 재벌개혁 등의 대목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에도 관련 분야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불거졌다.
하지만 현재 노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고, 파병을 추진중이다. 재벌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나 검찰 수사도 주춤거리는 형국이다. 대선과정에서 드러난 '개혁성'은 아직 아무것도 발현된 것이 없다.
현재 현 정부가 처한 환경이 너무도 엄중하기 때문일까? 전쟁이란 특수상황, 이로 인한 세계경제 불안의 벽에 막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둘째 '참여와 토론'이란 새 정부의 원칙 때문일 수 있다.
법률로 보장된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이 자신의 선택으로 임명하면 그만인 자리에 대해서도 수없는 추천과 토론과정이 이어진다. 그래서 초기 인사도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인사 조차 이럴진대 다른 굵직한 개혁조치들이 쉽사리 결정될 리 없다. 부처별 업무보고가 조금씩 진행중이지만 매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해나갈지에 대한 토론이 주를 이뤘다.
현 정부가 처한 구조적 위치 때문에 대미관계, 남북문제, 재벌개혁 등 외교.경제 분야의 과감한 개혁이 어렵다 하더라도 기타 분야, 행정.교육.사회.노동.여성.복지 등의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여소야대 상황을 감안해도 법 개정 없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아직 눈에 띄게 추진되고 있는 일이 없다. '참여와 토론'의 원칙 때문에, 지금은 본격적인 개혁 추진을 위한 시스템 정비중인가?
***이제 뭔가 보여줘야 할 때이다**
취임 한달이 평가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일 수 있다. 적어도 취임 백일 가량은 지내 봐야 노무현 정부의 본모습이 드러날는지 모른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 가는지 본격적 평가가 시작된다. 실천과 업적을 통해 뭔가 보여준다면 앞서 언급한 '전쟁 상황, 경제불안' 혹은 '참여와 토론의 원칙' 때문이라는 말이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황이 되풀이될 뿐이라면 '준비 없는 대통령', '아마츄어리즘의 극치'라는 혹평에 직면할 것이다.
정부는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노무현 정부 출범 한달, 아직은 평가할 게 없다. 이젠 뭐든 보여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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