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이름난 거장 감독 중에서도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더욱 특이한 존재로 꼽힌다. 알모도바르는 언제나 자극적인 소재와 통속적인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지난 21일 개봉한 알모도바르의 신작 <귀향> 역시 그렇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인공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는 남편의 시체를 유기한다. 그렇다고 라이문다가 죄책감에 시달리느냐 하면 그건 또 천만의 말씀이다. 배포도 큰 '억척녀' 라이문다는 남편의 시체를 처박은 냉동고가 멀쩡히 자리하고 있는 식당에서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점심을 팔아 돈을 번다. 뻔뻔한 주인공과 그들의 도발적인 욕망,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무기로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의 영화를 통속적이거나 자극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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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프레시안무비 |
알모도바르는 각각 2002년과 2004년작인 <그녀에게>와 <나쁜 교육>에 이어 이번에 내놓은 <귀향>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변신을 선보인다. <귀향>은 짜릿한 재미를 선사하는 한편으로 가슴 뭉클한 삶의 혜안과 운명의 화해를 그린다. 한때 사람들은 알모도바르를 스페인의 악동감독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서로간의 이해와 용서에 대해 얘기하는 삶의 구도자로 받아들인다. 새 영화 <귀향>의 세가지 키워드를 통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세계를 탐구한다.
. 1. 파격과 도발의 난장 <귀향>의 라이문다는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고백하는 딸 파울라(요아나 코보)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 라이문다는 아버지가 자신을 성추행하려 했다는 파울라의 말을 듣고는 그녀를 끌어안는다. 파울라를 감싸안은 라이문다의 눈빛은 순간 비장하게 빛난다. 그러나 라이문다는 곧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어둠을 틈타 무거운 시체를 들고 옮기는 라이문다와 파울라의 모습에서 좀 전의 비장함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어느새 영화의 분위기는 비장한 드라마에서 소란스런 코미디로 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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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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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언제나 파격적인 소재와 도발적인 형식으로 눈길을 끌어왔다. 살인은 물론이고 성전환자나 동성애자는 알모도바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성적 학대와 근친 상간만이 아니라 이번 <귀향>에서는 슬그머니 유령까지 끼어든다. 당연히 이야기는 또 황당할 지경까지 다다른다. 알모도바르의 이같은 특징은 초기작에 해당되는 1982년의 <정열의 미로>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아랍국의 왕자가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동성애자인 테러리스트의 위협을 받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왕자는 펑크록 가수로 변장하는데 그 후 왕자는 록 그룹의 멤버와 사랑에 빠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알모도바르의 천연덕스러운 연출력이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파격을 몰고 오지만 알모도바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상황을 전개시킨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B급 멜로드라마와 코미디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화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그때문이다. 알모도바르가 80년대에 줄곧 차용하는 충격적인 소재들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해 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알모도바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스페인의 정신적 혼돈을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 2. 사회로부터 금지된 모든 것을 욕망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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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낮과 밤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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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의 영화가 그리고 있는 자극적인 소재와 도발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솔직하면서도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에 가깝게 다가서 있기 때문이다. <귀향>의 라이문다는 남편의 시체를 유기하고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다.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라이문다의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의 인물들은 대개가 자신의 원초적 욕망에 충실하다. 사회적 관습이나 체면 따위도 그들의 욕망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은 비정상적인 욕망까지 자유자재로 펼쳐 보인다. 1986년작 <마타도르>에서 주인공 디에고는 마리아와의 섹스 끝에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리아와 정사를 나눈다. 그의 예상대로 마리아는 정사 중에 디에고의 머리에 침을 꽂아 그를 죽인다. <욕망의 낮과 밤>의 릭키(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평소 흠모했던 포르노배우 마리나(빅토리아 아브릴)의 집에 쳐들어가 여자를 감금하고 자신의 사랑을 강요한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파격은 인물들이 내뿜는 솔직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 강렬한 욕망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순수하다. 그 점에서 그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괴한 드라마를 만들어나간다. 알모도바르는 인물들의 광적인 욕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명사회의 이면에 숨은 언더그라운드적인 무의식을 건드리려 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역설적인,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3. 화해와 연대의 이름, 여성 그리고 어머니 알모도바르의 초기작이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어두운 분위기로 그려냈다면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이후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파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간의 연대와 화해를 그려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이번 영화 <귀향>에서 라이문다의 어머니 이렌느(카르멘 마우라)는 유령이 되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딸들에게 돌아가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운명의 악습을 끊고 끝내 가족을 다시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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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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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도바르가 여성,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 날뛰는 욕망들을 화해시키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작품의 대표격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소원해진 남편을 찾아가는 '어머니' 마누엘라(세실리아 로스)의 이야기다. 여장남자가 된 남편 롤라(토니 칸토)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마누엘라는 성매매를 하는 아그라도(안토니아 산 후안), 롤라의 아기를 임신한 수녀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만나고 차례로 그들을 끌어안는다. 마누엘라의 보호 아래, 마리아는 에이즈에 걸릴 위험이 있는 아기를 낳고 어머니가 된다. 영화의 끝에서 마리아의 아기는 에이즈로부터 안전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마리아는 마누엘라에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얘기한다. 평론가들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보고 '키치적인 악동'이라 불리던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세계의 화해를 이야기하며 한층 성숙해진 면모를 보인다고 극찬했다. 그 뒤 선보인 <그녀에게>에서도 알모도바르는 또 한번 사랑의 기적을 선보인다. 주인공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의 지극한 사랑은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를 살려낸다.
. 4. 음악과 미술, 무용의 매혹적인 요지경 파격에서 기적과 화해까지.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강렬하면서도 따뜻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끝내 평화롭다. 그 주제와 매력만큼이나 알모도바르 영화에서는 감독의 다양한 문화적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알모도바르의 여느 영화와 다름 없이 <귀향>에서도 강렬한 색채들이 화면을 장악하고 라이문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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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中 피나 바우쉬 공연 장면 ⓒ프레시안무비 |
전작인 <그녀에게>야말로 바로 알모도바르가 음악과 미술, 무용 등 예술 전반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로 꼽히는 작품. <그녀에게> 개봉 당시 브라질 출신의 명가수 까에따노 벨로소가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부르는 장면만으로도 영화 티켓 값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에게>는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공연 장면을 통해서도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쁜 교육>에서 어린 이나시오가 부르는 '문 리버' 장면도 쉽게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관객들이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별책부록을 기다리듯 아름다운 화면이나, 음악, 공연 장면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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