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경찰이 6ㆍ25 전쟁 기간과 그 직후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1만7000여 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공식 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북한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간첩단으로 발표됐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은 자생적 사회주의 단체였을 뿐 북한과 실제 연계는 없었다는 점도 재확인됐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 한성대 교수)는 14일 이런 내용을 담은 '보도연맹원 학살의혹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 '1946년 대구 10ㆍ1 사건'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 보도연맹원 학살의혹 사건 =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 학살의혹 사건이란 6ㆍ25 전쟁 중 경찰, 군, 우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집단학살했다는 의혹 사건을 말한다.
경찰청 과거사위는 경찰 전산자료를 검토해 6ㆍ25 당시 민간인이 최소한 1만7716명 학살됐으며 이 중 3593명 이상이 보도연맹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학살을 실행한 주체는 경찰 1081명과 군인 5157명이었으며, 개전 초기에는 경찰이 예비검속을 전담했으며 전시 계엄하에서는 헌병ㆍ특무대 등 군도 관여했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의 근거로 쓰인 내무부 치안국장 명령은 법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위원회는 덧붙였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이승만 정부가 일제 시대나 해방 직후에 좌익활동을 하다가 자수ㆍ전향한 민간인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변단체로, 회원 수가 6만2000여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같은 피해 규모는 입력된 전산자료에만 의존한 것이어서 실제 희생자 수나 보도연맹원 피해자는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실제로 1978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6.25 당시 처형자 명단'에는 2만6330명이 죽은 것으로 돼 있는 등 기록상 통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위원회가 검토했던 일부 자료에는 보도연맹원 수가 20만∼30만, 많게는 70만 명으로 나와 있기도 했다.
◇ 남민전 사건 =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직전인 1979년 10월 발표된 남민전 사건은 당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반국가활동을 벌인 대규모의 도시게릴라 단체'로 규정됐다.
그러나 경찰청 과거사위는 "기존 대법원 판결대로 남민전이 사회주의를 지향한 실존 조직이었음은 인정되지만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한 것은 아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 차원에서 북한과 연계를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기소 전 언론에 보도됐던 것처럼 '간첩단 사건'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당시 검찰 기소 내용에도 간첩활동 혐의는 빠져 있었다. 위원회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실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다만 가혹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당시 수사관들의 진술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46년 대구 10ㆍ1 사건 = 1946년 10월 초순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발생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대규모 소요사태는 노조 파업단과 대치하던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면서 촉발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총격 등으로 인한 희생자는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관을 포함해 518명, 다른 집계에 따르면 398명으로 나와 있으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었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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