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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는 '그날'사흘 전 '노동자 위해 죽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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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는 '그날'사흘 전 '노동자 위해 죽겠다'고 했다"

[인터뷰] 전태일이 짝사랑했던 소녀 김예옥 씨

"부실장은 김예옥이라는 예쁘게 생긴 여학생으로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나는 이 부실장이 좋았다. 얼굴도 곱게 생겼지만 공부도 잘 하고 또 내가 하는 이야기는 총명하게 잘 이해하여서 내가 교단에 나가 이야기하는 보람을 가지게 했다.

다른 학생들 같으면 아무리 의문난 점이 있어도 질문하는 여학생은 한 사람도 없는데 예옥이 만은 곧잘 질문도 하고 사뭇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주시하면서 나의 용기와 지혜의 도움이 되어 줬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전태일 지음, 돌베개 펴냄) 중.



전태일 열사가 짧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의 동료 김예옥 씨는 말하자면 전태일의 '짝사랑'이었던 셈이다. 한 사람의 가슴을 시리도록 흔들어놓되 외형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30여 년 전의 그 시절을 되짚어보는 가운데 김예옥 씨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던 전태일. 그는 이 운명의 날을 사흘 앞두고 짝사랑하던 예옥 씨를 찾아가 어머니 이소선 씨도, 함께 이날 시위를 준비하던 동료들도 미처 몰랐던 '결심'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두고 누군에겐가는 그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노동자들을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마지막 결심을 짝사랑의 대상에게만은 미리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은 10일 강원도 홍천에 사는 김예옥 씨를 만나 그의 동창 전태일에 대한 그의 추억과 그 마지막 만남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내가 죽어야만 해결이 된다. 다른 방법이 없다"

▲ 전태일의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동창인 김예옥 씨. ⓒ프레시안

"1970년 11월이었죠. 갑자기 태일이가 대구까지 나를 찾아 왔어요. 그 때 나는 아동복 수출업체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태일이가 회사로 전화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어쩐 일이니' 했더니 '좀 만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6시에 퇴근해서 태일이를 만났어요. 회사 앞에서 만나니 태일이가 택시를 잡아 타고 동촌유원지를 가자는 거예요. 그 때만 하더라도 택시 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죽으려고 그랬는지…."


아무리 친구여도 무턱대고 '그냥 나랑 같이 동천유원지에 가자'는데 좀 겁이 났다는 예옥 씨. 초겨울 11월의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자기 마음 속의 첫사랑과 함께 강둑에 나란히 앉은 전태일은 아주 담담하게 '결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때 태일이가 나한테 별의 별 얘기를 다 했어요. 주로 노동자들이 일하다 쓰러지는 상황, 자기가 일하는 공장의 시다들 얘기 같은 것이었어요. 시다들이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수 차례 얘기하더라구요.

바쁠 때는 약까지 먹여가면서 24시간 일한다고…. 그런데도 그만큼 보상을 못 받는다고 했어요. 너무 불쌍하다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된다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고 했죠."

"노동자들을 위해 죽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21살 예옥 씨는 "처음에는 농담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두 살 위의 친구 얘기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예옥 씨는 "꼭 니가 죽어야 해결되니? 왜 죽으려고 그러니?"라고 말렸다. 그의 말에 전태일은 "내가 죽어야만 해결된다.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안 죽고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아무 곳에서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여기 저기 탄원서를 냈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고. 오죽하면 죽으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전태일은 1970년 10월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보냈다. 이 진정서를 제출한 다음 날 석간신문들을 통해 처음으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의 처참한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환풍기도 설치되지 않은 다락방에서 시다들은 약을 삼켜가며 일을 해야 했다. 예옥 씨를 찾아간 것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을 그 즈음이었다.

"그리하고는 버스를 타고 대구 대명동에 왔죠. 거기서 떡만두국을 한 그릇씩 시켜서 둘이 먹었어요. 그 때만 하더라도 떡만두국이 비싼 음식이었죠. 저녁을 먹고 나니 태일이가 빵집에 들러서 빵을 한 보따리 사더라구요. 그리고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더니 문을 열어준 동생에게 그 빵 봉지를 건네주데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나를 찾아왔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어요"
▲ 전태일이 분신하기 며칠 전 그를 찾아와 "노동자를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털어놨다. ⓒ프레시안

며칠 후 김예옥 씨는 전태일이 분신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옥 씨는 그 때 말리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 한참을 울었다.

"나를 찾아왔을 그 때 말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더라구요. 태일이가 찾아와서 죽는다고 했을 때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말리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한 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그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친구라고 찾아와서 나한테 속을 다 털어놨는데 내가 머리가 어쩌면 그렇게 둔했는지 말리거나 그럴 생각을 감히 못했어요.

내가 너무 바보였구나 싶었죠. 물론 내가 못하게 한다고 해서 태일이가 안 하지는 않았겠죠. 내 말을 들었겠어요? 그러지 말고 살아서 해보라고 한들 내 말을 듣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너무 미안해서 태일이 엄마도 못 만나겠더라구요."


"훌륭한 어머니 그리고 아들…어머니 조만간 다시 찾아뵈야죠"

결혼한 뒤 예옥 씨가 전태일의 동창이라는 것을 안 남편이 이소선 어머니를 함께 찾아가보자고 그를 설득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미안해서'였다. 그러던 그가 지난달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이소선 씨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싶더라구요. 어머니가 참 훌륭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일이도 그렇게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는데 어머니는 오죽했겠어요. 그런데 어머니 인터뷰 하시는 걸 들어보니까 아들이 어머니에게 노동법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외우라고 그랬다더라구요. 아들이 그런다고 또 그걸 읽어보고 외우는 어머니나 그런 아들이나 둘 다 훌륭한 거죠.

사실 어머니는 아들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어머니들은 다 느낌으로 알아요. 나같으면 아마 '바보 같은 짓'이라고 뜯어 말렸을 텐데 이소선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전태일은 죽기 전 병원에서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뤄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뜻대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 김예옥 씨는 "아들도 어머니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어머니를 뵙고 나니 그 분의 훌륭함이 아들을 통해 표현된 거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녹화 시간에 쫒겨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던 짧은 만남. 김 씨는 "조만간 서울에 올라가서 엄마를 찾아뵐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본인 역시 병으로 아들을 먼저 보내기도 해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다는 예옥 씨.

"자식 먼저 보낸 엄마 심정은 다 똑같죠. 찾아뵙고 엄마라고 부를 거예요. 태일이 엄마니까 나한테도 엄마죠. 찾아뵙고 '엄마, 나도 아들 하나 잃었지만, 나는 병으로 잃었으니 덜 억울해도 엄마는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라고 위로해드려야죠."

"늘 책을 들고 다니던 조용한 아이…친구 통해 날 좋아했단 얘기 들었어요"
▲ 김예옥 씨가 갖고 있는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의 사진. 오른쪽 아래의 소녀가 김예옥 씨. ⓒ프레시안

전태일이 기억하는 예옥 씨는 '얼굴도 곱고 공부도 잘 하는 총명한' 소녀였다. 그가 기억하는 전태일은 어떤 사람일까?

"참 깔끔하게 생겼었어요. 부잣집 아들 같았죠. 키는 162~163cm 정도로 작았고 얼굴이 약간 넓어서 빈하게 보이지 않았어요. 또 말투가 서울 말투였어요.

게다가 태일이가 학교를 두어달 늦게 들어와서 서울에서 전학 온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죠. 태일이는 참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늘 책을 한 손에 끼고 다니는 멋진 친구였죠."

전태일에게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뛸 듯이 기쁜"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학창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어려운 집안 환경 탓이었다. 그 때문에 예옥 씨 역시 전태일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것은 전태일이 워낙 조용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

"태일이는 참 멋지게 잘 입고 다녔어요. 까만 외투를 입고 구두를 신고 오는데 처녀인 내가 볼 때 '재단사라더니 과연 다르구나' 했어요. 그런데 지난 번에 어머니 말씀 들어보니까 외출복이 하나였다고 하더라구요. 친구들 만나러 가거나 할 때만 그 옷을 입고 나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나는 항상 깔끔하고 멋있게 입고 오니 집안이 어려운지는 더 몰랐죠."

"태일이 희생으로 좋은 세상 남겨줬죠"

예옥 씨는 "그렇게 가난한 집 아들인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훗날 남편이 <전태일평전>을 사다줘 그 책을 읽고서야 전태일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게 됐다는 김 씨. 그는 학창시절 자신이 전태일의 짝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태일이가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한 적은 없었으니 몰랐죠. 또 다른 동창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랑 태일이랑 뒷산에 가서 싸웠다고 하더라구요. 친구들 얘기가 나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렇구나 했지 나한테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어요. 워낙 말이 없기도 했고.

그리고 그 때만 하더라도 학교 선생님들이 다들 대학생들이었어요. 전쟁 때문인지 대학생 선생님들이 나이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당시 여학생들은 대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동창들은 신경을 쓰지 못했죠. 친구들은 그냥 친구였죠."


그는 전태일이 분신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당시 '무서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그의 동창 전태일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편으로는 어찌 보면 잘 갔다 싶기도 해요. 독립투사들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독립된 나라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겠어요? 마찬가지로 태일이 같은 그런 사람이 없었으면 노동조건이 바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태일이가 그렇게 가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거 잖아요. 최소한 달라지는 계기가 생겼지요. 그런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후세들이 좋은 세상을 누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참 대단하고 잘 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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