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진기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로버트 카파. 그러나 그는 사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잡지 <라이프>의 편집장이었던 존 모리스는 "카파는 평범한 앵글을 선호했으며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로버트 카파의 생애를 다룬 전기 <로버트 카파>(알렉스 커쇼 지음, 윤미경 옮김)가 출간됐다. 책의 저자가 카파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내용을 기본으로 엮은 이 책은 앞서 나온 카파의 종군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와는 또다른 흥미를 준다.
전쟁
"전쟁은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 같다. 사진은 점점 잘 안 받으면서, 점점 더 위험해진다." (로버트 카파, 1944년)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카파는 1931년 정치적 박해와 반유대주의를 피해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진 에이전시의 암실 조수로 일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남들과 언어가 달라도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사진'에 매료됐다.
그는 트로츠키의 마지막 대중연설 모습을 찍으면서 본격적인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본명이 앙드레 프리드만이었던 그가 전문기자 행세를 하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미국식 이름을 쓰게 된 것도 그때였다. 내전이 벌어진 스페인에 들어간 카파는 그곳에서 훗날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총에 맞고 쓰러지는 공화군 병사' 등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그 후에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로 가 사진을 찍는 '종군기자'의 길을 택했다.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2차대전의 아프리카 전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
카파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현장을 찍었고, 그 강렬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죽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활약상'은 훗날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카파는 바로 옆에 있던 병사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총알이 살을 스친 적도 있었고, 적군으로 오인을 받아 총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왜 이 같은 위험을 무릅썼을까? 명예를 위해서, 혹은 그가 전쟁을 즐겼던 것일까?
고통
카파가 단지 '총에 맞고 죽은 병사'나 '공격을 준비하는 군인'들만 찍은 것은 아니었다.
1939년 3월 스페인의 반란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할 때까지 최소한 30만 명이 죽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카파는 폭격을 피해 지하철역에 숨어있는 이들의 모습과 피난민 소녀의 절망적인 표정 등을 사진으로 남겼다.
또 중일전쟁 당시 일본인의 공습 뒤 울고 있는 중국 여인의 모습,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삭발당한 채 조리돌림을 당하는 장면 등도 카파가 사진으로 남긴 전쟁의 일부였다.
우리는 카파가 했던 말과 그에 대해 친구들이 한 말을 통해 전쟁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고통을 기록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차를 타고 점령한 도시를 돌다보면 처음에는 우쭐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곧 온통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유혈의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로 살았던 카파는 전쟁을 증오했고 전쟁 기념탑과 기념비를 수치로 여겼다."
도박과 연애, 그리고 후유증
사진기자라는 직업을 떠난 한 인간으로서의 카파는 또 다른 면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박과 술, 그리고 연애에 탐닉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자유분방하고 유쾌했던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쟁작가였던 헤밍웨이나 스타인벡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당대 스타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켰다.
카파의 친구는 "그는 전쟁으로 돈을 벌긴 했어도, 포커 때문에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파는 돈을 잃어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카파는 전쟁을 겪고 난 뒤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10년 이상 종군을 한 카파는 불안, 과도한 음주, 짜증, 우울증,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징후들을 보였다고 한다. 카파의 지인들은 그가 그토록 '유쾌한 척'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카파는 그 덫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밤에 일찍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지요. 그는 카파였고, 카파는 항상 3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포커를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일이 피곤해졌어요. 늘 우스갯소리를 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카파도 사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카파에게는 슬라브 유대인의 일부였을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슬픔이 전쟁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잉게 모라스)
죽음
2차대전이 끝난 뒤 카파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전쟁을 혐오하며 "실직한 종군기자라서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전쟁은 카파를 전설로 만들었고 그 전설을 유지하려면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카파는 1947년 오랜 친구였던 데이비드 침 시모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사진기자들과 함께 '매그넘'이라는 사진 에이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에 접어든 뒤에도 도박과 유흥으로 돈을 써버리던 카파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동남아시아에 취재를 나갈 것을 제안받았고,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에 베트남의 전장에서 지뢰를 밟고 사망했다.
그리고 사진
카파는 2차대전 도중 전장의 한복판에서 20세의 한 젊은 미국 군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사람들이 듣는 건 승리와 영광뿐입니다. 100미터를 진군할 때마다 우리들 중 누군가 죽어나가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라요. 이 생활이 얼마나 힘겨운지 왜 말하지 않는 거죠?"
전쟁에 종군했던 기자와 사진기자들이 언제나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그들은 겁을 먹기도 했고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기도 했다.
카파를 아는 이들이 모두 공감하는 점은 그가 용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파가 유명해진 것은 단지 그가 용감했고 전장에서 살아남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대의 증인이 되고 싶어했던 카파는 그가 겪었던 '끔찍한 전쟁'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실제로 그의 사진들을 보다 보면 '내가 그 전쟁터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당시의 생생한 고통과 참혹함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카파의 사진을 통해 20세기 인류가 저지른 참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책의 저자는 "카파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출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진기자였다"고 평한다.
"사진 두 장이면 수천 개의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던 사람,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사진기자, 그는 카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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