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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화, 그러나 다시 찾은 영화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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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화, 그러나 다시 찾은 영화 <열녀문>

[이슈 인 시네마] 故신상옥 감독 작품, 올 부산영화제 통해 공개돼

故 신상옥 감독의 <열녀문>(1962)의 복원 소식에 충무로가 들썩이고 있다. 그 동안 행적이 묘연해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신상옥 감독의 대표작 <열녀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한국영상자료원은 복원과정 중에 있는 <열녀문>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을 통해 세상에 공개할 예정이다. <열녀문>의 재탄생에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 2년 간 기울인 각고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4년11월 한국영상자료원은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 소속 필름 아카이브간 교류와 한국영화 발굴 조사차 대만영상자료원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16mm필름으로 소장돼 있던 <열녀문>을 발견한다.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은 대만영상자료원에 정식 기증 요청을 했고, 양국 영상자료원은 6개월간의 조사와 협의과정을 거쳐 2004년 6월 우리 측에 필름을 기증할 것에 합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열녀문>은 2004년 12월 마침내 한국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됐다.
열녀문 ⓒ프레시안무비
한국영상자료원은 곧바로 16mm 필름을 35mm로 전환하는 복원 작업을 착수했다. HD텔레시네를 실시한 필름은 HD 전환 후에도 약 30분 가량이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음향에 큰 손상이 가있는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바로 디지털 시네마 영상복원 회사인 'HFR Co. Ltd.'. 이 'HFR'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열녀문>은 비로서 발견 당시보다 훨씬 매끄러운 음향을 갖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녀문>의 현재 필름 복원상태는 약 20% 수준.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앞으로 1~2년 뒤에야 완벽하게 복원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부산영화제에서는 복원이 부족한 상태나마 'HD마스터 테이프'를 통해 이 <열녀문>을 상영할 예정이다. . 60년대 한류의 원조, <열녀문> <열녀문>은 영화는 고사하고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조차 미미하던 60년대에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지명만 돼도 화제가 됐던 아시아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열녀문>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에도 큰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열녀문>은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신인 한국필름보관소가 74년 당시, 필름 보관에 실패하면서 영화의 존재 여부 조차 불분명하게 되기에 이르른 것. <열녀문>은 젊은 과부와 머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 머슴과 금지된 사랑을 나눈 과부는 임신하게 되고, 머슴은 아기를 데리고 쫓겨난다. 청년이 된 아들이 어머니인 과부를 다시 찾아오지만 과부는 찾아온 자식을 다시 외면한다. '장르 영화의 대가'라고 불렸던 신상옥 감독은 <열녀문>에서 사극과 멜로드라마를 넘나들며 사회적 관습에 억눌린 여성상을 비판적으로 그려냈다. 신상옥 감독의 연출력뿐 아니라 최은희, 신영균, 한은진 등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열녀문> 복원의 의미 영화역사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열녀문>의 복원은 따라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1919년부터 현재까지 연대별 통계를 봤을 때 한국 극영화 보유율은 64.8%다. 이는 80%이상을 기록하는 미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자국영화보유율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낮은 수치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장광헌 관리팀장의 이같은 평가에 비추어 볼 때 <열녀문>의 복원은 한국영화사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국내외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상옥 감독은 누구인가?
신상옥 감독은 60년대 당시 한국 최대영화사를 소유하며 한국 영화계의 거인으로 군림했다.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의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아우르는 폭넓은 영화세계를 선보인 한국영화계의 '거인'이었다. 신상옥은 1945년작인 <독립전야>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완성도 높은 초기작들을 선보였던 신상옥의 영화인생은 배우 최은희를 만나면서 만개하기 시작한다. 신상옥은 최은희를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상을 선보이며 한국 멜로드라마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와 <성춘향>(1961). <성춘향>의 성공으로 신상옥은 자신이 운영하던 '신필름'을 한국 최대 영화사로 발전시키면서 제작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상록수>(1961)의 흥행은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박정희 정권과의 '깊은 관계'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부인 최은희에 이어 신상옥 또한 홍콩에서 납북됐던 것. 그러나 납북기간 동안에도 신상옥은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소금>(1985)을 비롯 7편의 영화를 만든다. 이후 1986년 신상옥과 최은희는 미국 여행 도중 탈북에 성공하고 이후 미국에 머물며 영화작업을 계속하다 90년대 후반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말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작품 구상에 몰두하던 신상옥은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 4월 11일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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