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모든 택시에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승객이 택시를 탈 때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가칭 '안심택시'(혹은 '그린택시', '모바일캅')라 불리는 이 제도는 승객이 휴대폰에 해당 택시의 고유번호를 입력하면 택시에 관한 정보가 휴대폰에 저장되게끔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의 휴대폰으로 이런 정보를 전송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택시 운전기사들이 이런 제도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기사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여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반발을 무릅쓰면서 추진하는 '안심택시' 제도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모든 택시에 고유번호 부여…휴대폰으로 택시 정보 전송
서울시 관계자는 5일 택시업계, 택시노조, 교통전문가, 시의회 의원 등이 참여하는 택시정책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거친 뒤 10월 말까지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안심택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시내에서 운행 중인 법인 및 개인택시 7만2500여 대 모두에 6자리의 고유번호를 부여할 방침이다. 고유번호의 앞 4자리는 차량번호이고 뒤 2자리는 일련번호다. 이같은 고유번호는 스티커에 인쇄돼 조수석 앞 유리 상단과 뒷 좌석 옆 유리에 부착된다.
승객은 휴대폰에 '**36524'(365일 24시간 안전하다는 뜻)를 누르고 이동통신 3사의 인터넷서비스에 접속한 뒤 고유번호를 입력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차량 번호와 함께 택시회사 전화번호(개인택시의 경우 사업조합 전화번호), 도난·행정처분 차량 여부 등을 알 수 있다. 승객은 이 정보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하거나 가족 혹은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로 전송할 수 있다.
이는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고안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초 한 무선인터넷 업체가 서울시에 이런 서비스를 제안했다. 지난해 택시 운전사가 승객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되던 무렵이었다.
택시 운전사가 잠재적 범죄자라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에 대한 택시 운전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서울지역 개인택시 조합원들의 모임인 '서울개인택시연대'는 최근 '안심택시' 제도에 반대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서울시가 택시 운전사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의 호소문을 접한 한 택시 운전사는 "오히려 승객이 강도로 돌변해 운전사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더 많다. 왜 운전사만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택시 운전사는 "운전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것도 불쾌하지만 이 밖에도 문제는 많다"며 "술에 취한 승객이 실수로 차량번호를 잘못 입력한 경우 엉뚱한 운전자가 곤욕을 치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박이형준 씨는 "당장 택시 운전사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게 아니라 해도 차후 승객의 휴대폰으로 전송되는 정보의 양이 늘어나면서 운전사의 정보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며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택시 운전사들이 느끼는 불쾌함을 개인적 불만으로 취급하고 넘길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개인을 배려하는 인권 감수성의 수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불쾌하다. 그래도 승객만 늘어난다면야…."
하지만 많은 택시 운전사들은 이런 논란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처지가 너무 어려워서 인권이나 불쾌함을 따질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0년부터 개인 택시를 몰았다는 김 모 씨는 "6년 간 월 수입이 100만 원 가량 줄었다"고 이야기했다. 김 씨는 요즘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번다. 이 정도 수입으로는 얼마 전 직장을 그만 둔 아내, 대학생 아들과 함께 가계를 꾸려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김 씨는 "인권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승객이 늘어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면 일단 찬성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개인 택시는 사정이 좀 낫다. 한 택시 회사에서 근무하는 김 모 씨는 사납금 8만3000원을 채우지 못 하는 날이 절반쯤 된다고 이야기했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하루 평균 택시 승객은 2000년 이후 4년 동안 15.4% 줄었다. 전반적인 내수 침체와 함께 대리 운전의 활성화, 지하철 심야 운행 등이 원인이다. 하지만 택시 면허 대수는 2000년 이후 5년 동안 7.2% 늘었다. 직장에서 밀려난 나온 이들이 대거 택시 운전사로 몰린 까닭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택기기사들의 월 평균 수입(지난해 8월 기준)은 109만2906원이다. 정부가 정한 최저 생계비(월 117만 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택시 운전사는 대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군에 속한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가 최근 4~5년 사이에 중산층에서 도시 빈민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택시노조가 '안심택시' 도입을 논의하는 택시정책심의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소나마 택시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돼 결국 택시 운전자들의 어려운 처지에 작은 힘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안심택시'가 아니라 도급제 근절이 해법이다.
전국민주택시노동연맹 김성한 사무처장은 "각종 범죄, 운전사의 미숙 등으로 택시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택시 운전사들이 살아남으려면 이런 불신을 깨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안심택시'와 같은 정책이 이런 불신을 깨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김 사무처장은 "최근 택시업계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도급제를 실시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택시에 대한 불신을 낳은 범죄나 운전 미숙 등은 주로 도급 운전사들이 모는 택시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택시에 대한 불신을 깨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도급제를 없애는 게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도급제란 택시 회사가 택시 한 대 당 하루 또는 한 달 단위로 돈을 받기로 하고 외부인에게 차를 넘겨주는 것을 말한다. 물론 도급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는 회사 소속이 아니다. 도급 운전사들은 회사에서 월급은 못 받지만 6만5000~7만5000원 가량의 사납금을 제외한 초과 수입금을 가져간다. 회사에 소속된 운전사보다 적은 사납금을 내는 대신 LPG 가스료, 정비 비용, 보험료 등의 차량 유지비는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도급제 운전사들이 내는 사납금은 회사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수입으로 잡히지 않는 일종의 비자금이 된다. 회사는 불경기 속에서 남아도는 택시들을 이용해 세금이 안 붙는 수입을 얻는 셈이다.
도급제로 일하는 운전사들은 택시 운전사 자격증이 없는 경우도 왕왕 있을 뿐더러 회사에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책임감을 갖기 어렵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경우가 많아 무리한 운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범죄, 불친절 운행, 운전 미숙 등 시민들이 택시에서 느끼는 불만이 대부분 도급제로 운행하는 택시 때문에 생긴다는 지적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도급제에 대한 처벌 규정 마련이 핵심"
택시 운전사들 중 도급 운전사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정확히 집계된 바는 없다. 하지만 택시 업계 관계자들은 "대략 40%는 넘을 것"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불법적인 도급제를 없앨 방법은 없는 것일까?
도급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폐단을 낳았던 지입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지입제는 운전자가 자신이 소유한 차를 택시 회사에 등록하여 운행하면서 월급을 받는 제도다. 지입제 운전자는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 하는 까닭에 종종 무리한 운행에 내몰려 왔다. 90년대 후반까지 성행하던 지입제는 최근 크게 줄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법적 관행인 지입제에 대해 택시업체의 사업면허를 취소할 수 있는 강력한 처벌 조항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현재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운수사업법) 24조 여객자동차 운수사업의 개선 명령이 도급제를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적 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은 도급제에 대한 명확한 처벌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담당 공무원들이 엄격한 단속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기대석 민주택시연맹 정책기획국장은 "도급제에 대해 지입제 수준의 강력한 처벌 조항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택시에서 느끼는 불안을 정말 없애고자 한다면….
실제로 도급제에 대한 처벌 규정을 명문화한 법안도 이미 마련됐다. 이호웅 열린우리당 의원이 2004년 11월 이런 규정을 신설한 운수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2005년 2월 건교위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된 뒤 지금까지 계류 중이다.
기 국장은 "현재는 90% 이상의 택시 업체가 각기 다른 규모로 도급제 운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명확한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나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도급제를 시행하려는 업체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처벌 규정을 담은 운수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도급제는 상당부분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 국장은 "서울시가 정말로 시민들이 안심하고 택시를 탈 수 있기를 바란다면 운수사업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세훈 시장이 직접 나서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안심택시'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한 택시 운전사는 "왜 역대 서울시장들은 선거 때는 택시 운전사들의 환심을 사려 하다가 막상 당선만 되면 운전사들을 괴롭히려는지 모르겠다"라며 "택시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택시 운전사가 전문직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되면 저절로 풀린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운전사가 승객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불친절한 행동을 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안심택시'와 도급제 근절. 택시 운전사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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