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외부 선장론'을 거론했을 때, 정치권은 조건반사적으로 고건 전 총리 쪽을 먼저 쳐다봤다. 외부 선장감 가운데 그동안 여권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설왕설래를 유발해 온 대권주자는 누가 뭐래도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오래 못 가 설득력을 잃었다. 그 대신 "탈당은 안한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방점이 찍히면서 오히려 '고건 배제론'에 무게를 실은 관측이 많아졌다.
'민주당+고건+열린우리당'을 축으로 국민중심당이 지역을 기반으로 합체하는 이른바 '서부벨트론'에 노 대통령이 심각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하기에 노 대통령의 '탈당 불가' 메시지는 곧 이런 방식의 정계개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우리당을 나가서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고 전 총리도 외부 선장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응수했다. "특정 정당에 입당하는 일은 없다"고 누누이 밝혀 온 평소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앞뒤 정황 상 노 대통령과 고 전 총리가 한 배를 탈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음을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고건이 아닌 '제3의 카드'로 후계구도를 완성하려는 노 대통령과 탈(脫)노무현 혹은 비(非)노무현 세력으로 몸집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고 전 총리 사이의 '배척의 논리'는 곧 '정계개편 퍼즐'의 첫 번째 조각이 맞춰졌음을 의미한다.
외곽 돌며 '아웃복싱'…희망연대가 주력부대
두 번째 수순은 연말께로 예상되는 여권의 분열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노 대통령이 "탈당은 없다"고 쐐기를 박음에 따라 친노 세력이 노 대통령과 함께 당을 떠나는 당초의 유력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 당을 뛰쳐나오는 자체가 '모험'임을 감안하면, 좋으나 싫으나 당청이 함께 가거나 소수의 반노 세력이 이탈하는 정도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당초 예상보다 정계개편이 소폭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고 전 총리가 범여권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도 대폭 줄어든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도 서서히 독자 생존을 준비하는 듯 하다. 오는 28일 발족하는 '희망한국국민연대'는 시민단체 성격을 표방하고 있지만 고 전 총리의 실질적인 정치조직이다. 고 전 총리가 공동대표를 맡게 될 예정이다.
특히 희망연대의 창립 선언문에는 "모든 의사결정은 국민의 생각을 상향식으로 모아가면서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전 총리 측은 이와 관련해 "기존의 정치행위와는 반대로 정치 소비자들이 주체가 되는 생활정치의 의제를 찾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의제를 던지는 기존 정당의 방식과 달리 일반 국민들이 '희망연대'를 통해 사회적 의제를 표면화시키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기존 정치권과 거리를 둬 온 고 전 총리의 칼라에 부합하는 조직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 전 총리 측은 '희망연대'를 중심으로 정치권 외곽에서 아웃복싱을 전개하는 한편, 정계개편 과정에서 "우리당과 민주당 등 기존 정치권의 일부가 '자연인'으로 결합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는 뜻도 밝혔다.
고건, 독자생존으로 가나
고 전 총리의 이같은 독자생존 모색에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러브콜'에 화답하는 순간 정치적 덫에 걸릴 것이 뻔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반(反)노무현 연대', '반한나라당 연대' 등 기존 정치세력이 짜 놓은 구도에 편제되는 순간 고건의 상품가치가 급격히 떨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 정치권의 '고건 영입론'은 선거의 절반이라는 '구도'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의도와 함께, 어디로 튈지 모를 '고건 변수'를 해체하고자 하는 의미가 큰 게 사실이다.
이는 뉴라이트 명망가들이 17일 한나라당을 향해 "고건을 끌어들이라"고 주문하며 '집권의 안전판'을 만들자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된다. 열린우리당의 '고건 연대파'들의 논리를 뜯어봐도 고 전 총리를 끌어들여 반한나라당 전선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려는 당면의 목표가 주안점일 뿐, 고 전 총리 자체를 '필승카드'로 보고 모셔오려는 게 아니다.
따라서 겉보기엔 어느 쪽으로든 선택의 문이 열려 있는 듯 보여도, 고 전 총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사실상 많지 않다. 고 전 총리 측은 "반한나라당이니 반노무현이니 그런 구도는 국민들이 원치 않는다.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얘기다"라면서 "따라서 특정 정파와 연대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마이웨이' 방침을 확인했다.
고 전 총리가 "극단을 배제한 중도세력 통합"이라는 포지셔닝에 공을 들이는 것도 '제3의 지대'에 남아 반노-반한나라 간의 이전투구에서 발생하는 마이너스 요소를 흡수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만약 고 전 총리가 지속적으로 독자생존을 고집한다면 내년 대선의 구도는 '고건 변수'를 중심으로 오히려 비교적 간명하게 전망할 수 있게 된다.
우선, '범여권 후보 대 한나라당 후보' 또는 '범야권 후보 대 열린우리당 후보' 등의 양자구도는 형성되기 어려워 보인다. 결국 현재의 여당 후보와 한나라당 후보, 그리고 고 전 총리의 삼자 구도를 일단은 기본꼴로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 가운데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반한나라당의 범여권 전선이 완결되지 않아 객관적으로는 한나라당에 유리한 모양새가 되리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이 갖고 있는 지역연대론에 대한 반감과 결과적으로 고 전 총리에 대한 거부감이 중요한 밑바탕 요인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전망 요소는, 아직 말하기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인제 정몽준 등 역대 대선의 '제3후보'들의 사례를 고 전 총리가 되풀이하지 않겠느냐는 대목이다.
지금 당장은 고 전 총리가 노리는 '반노-비한나라' 공간이 꽤 광범위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틈새 공간은 세력과 세력이 사활을 걸고 부딪히는 대선 국면이 진행될수록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 전 총리가 가장 고심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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