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31단독 한범수 판사는 10일 LG전자 사측의 '왕따메일'로 피해를 입은 정국정 씨가 구자홍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20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를 판결했다.
'왕따 메일' 피해자와 그룹 회장의 10년 싸움
재판부는 "피고는 당시 회사 대표이사로 직원의 직무수행과 관련해 발생한 문제를 임직원들이 대표이사 명의로 고소하거나 위증을 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과 원고를 둘러싼 문제점을 알면서도 이를 방조한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1988년 LG전자에 입사한 정 씨는 1996년 사내 구매비리를 내부고발했다. 정 씨의 고발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정 씨에게 포상이 돌아오기는 커녕 그는 승진에서 계속 누락됐을 뿐만 아니라 혼자 창가에 자리를 배치 받는 등 사내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또 1999년에는 '정 씨의 ID를 회수하고 컴퓨터를 못 쓰게 하며 회사 비품도 빌려주지 말라'는 내용의 이른바 '왕따 메일'이 사내에 돌았다.
이어 2000년 3월 해고당한 정 씨는 '왕따 메일'을 근거로 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LG전자 측은 같은 해 7월 "정 씨가 이메일을 조작했다"며 사문서 위조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고소인은 구자홍 회장이었다.
하지만 정 씨의 '사문서 위조'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정 씨가 이메일을 위조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김 모 대리는 '모해 위증죄'로 검찰에 의해 직권기소된 뒤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정 씨가 승리한 것이었다.
이 재판에서 이긴 뒤 정 씨는 자신을 '사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한 구 회장 등을 '무고죄'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더불어 "구 회장의 근거없는 고소로 피해를 입었다"며 3000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법원은 10일 구자홍 회장이 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검찰, '무고죄' 고소된 구자홍 회장 소환도 않고 계속 '무혐의'
이렇게 법원이 계속 정 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데 반해 구 회장의 '무고죄' 혐의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4년 넘도록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 씨는 '사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돼 재판을 받던 중 김 모 대리가 "이메일이 조작됐다"고 거짓증언을 하자 2002년 5월 김 대리를 '모해 위증'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남부지검은 당시 김 대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정 씨가 법원에서 '사문서 위조'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자, 남부지검의 상급기관인 서울고검은 김 대리를 '모해 위증' 혐의로 직권 기소하고, 남부지검에 '왕따 메일' 사건에 대해 다시 수사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고검은 "국민적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할 대기업에서 경찰, 검찰의 수사과정 및 재판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증거자료와 증인신청 등으로 실체적 진실 발견을 어렵게 만든 사건인 만큼, 기업 전체 차원에서 사건의 진상은폐 또는 그 밖의 범법행위는 없었는지 치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수사 명령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남부지검은 제대로 수사에 착수하지도 않은 채 사건을 종결처리했다.
이에 불만을 느낀 정 씨는 2003년 10월 아예 구 회장을 '무고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직접 고소를 했다. 그러나 중앙지검도 구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조차 실시하지 않은 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정 씨는 또 다시 서울고검에 항고했다. 고검은 이번에도 정 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2004년 3월 "(정 씨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한 내용이) 허위사실로 밝혀질 경우 고소장 제출을 지시한 회사 내의 최고책임자를 찾아내 무고죄로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두 번째 재기수사 명령을 내리고 사건을 남부지검에 배당했다.
그러나 또 다시 '무혐의' 처분. 구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 씨는 이에 서울고검에 다시 항고했다. 서울고검은 2006년 1월 세 번째 재기수사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사건을 배정 받은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4월 '각하' 결정을 내렸다. 구 회장이 소환에 응하지 않고 있고, 이미 여러 차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분노와 좌절이 겹쳐지면서 진이 빠질 법도 했다. 그러나 정 씨는 물러나지 않았다. 정 씨는 또 다시 서울고검에 항고했고, 서울고검은 이번에도 재기수사 명령을 내렸다. 네 번 째였다. 고검은 지난 6월말 사건을 남부지검에 배당했다. 하지만 남부지검은 접수 한 달이 넘도록 아직까지 사건번호조차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 씨는 "이미 법원에서 사문서 위조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고, 대법원은 위조 가능성이 없다고까지 명시한 사건이며, 위증을 한 사람이 처벌 받았고, 이번에 민사소송에서도 구 회장의 책임을 인정하는 등 검찰이 기소를 하면 100% 이길 수 있는 사건"이라며 "고검이 4번이나 수사 명령을 내렸는데도 검찰은 구 회장을 소환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정 씨는 또 "일반 서민들이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면 체포영장까지 받아서 잡으러 다니면서 재벌은 안 오겠다고 버티면 안 불러도 되는 것이냐"며 "이런 것이 '재벌 봐주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구 회장의 '무고' 혐의 공소시효는 2007년 7월까지다. 정 씨는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전혀 못했지만, 설마 검찰이 공소시효가 완료돼 구 회장을 처벌할 수 없을 때까지 사건을 끌겠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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