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편법증여 사건' 항소심을 심리 중인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이상훈 부장판사)가 20일 열린 공판에서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당시 기존 주주들의 실권 과정을 밝힐 것을 검찰에 강하게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전환사채 발행 당시 이건희 회장 등 에버랜드 주주들과 에버랜드 경영진의 공모 관계를 밝히라는 것과 다름 없어 검찰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당초 이날은 선고 전 마지막 공판인 결심공판이 열릴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지금까지 검찰이 추가로 제출한 증거는 새로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며 "검찰은 재판부가 알고 싶은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재판부는 이어 "이 사건 결심을 하면 충분히 판결을 할 수도 있지만, 실체적 진실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판결하겠느냐"며 "그렇게 하면 형식적 재판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형식적 재판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재판부가 요구하는 '실체적 진실'이란, 허태학·박노빈 당시 에버랜드 경영진이 전환사채 발행과 기존 주주들이 실권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법인 명의의 주주인 경우 그 법인에서 실권을 결정한 자가 누구인지, 허·박 씨는 이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등의 공모 관계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발행할 당시 기존 주주들 중 제일제당을 제외한 중앙일보, 한솔케미칼, 제일모직, 삼성물산 등은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했고, 이들이 포기한 주식은 주당 7700원에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상무 등에게 넘어갔다.
재판부는 "허태학, 박노빈 두 피고인의 배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당시 개별 주주들의 실권 과정을 알아야만 한다"며 "1심 판결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현재 이 부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사를 한 내용이 있으면 최소한 개별 주주들의 실권 과정의 사실관계만이라도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재판부는 특히 "전체 주주들에 대한 실권 과정 파악이 어렵다면 몇몇 지배주주들이 실권하게 된 경위만이라도 밝혀야 한다"며 "예를 들어 중앙일보의 누군가가 실권을 결정했을 텐데, 이 과정에서 누가 이런 의사결정을 했고, 두 피고인은 어떻게 개입을 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다만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이번 재판은 허태학, 박노빈 두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기 때문에 삼성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에는 관심이 없고, 실체적 진실에 따라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무한정 재판이 길어질 수는 없지만, 재판이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검찰은 문제 부분을 석명하겠다며 "두 피고인은 중앙개발(옛 에버랜드) 주주 상당수가 CB를 인수하지 않을 것을 인식하면서도 별다른 자금조달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 CB 발행을 계속 추진했다. 또 CB의 적정 가치에 대한 판단도 없었고 이사회의 CB 발행 결의에도 하자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결국 검찰은 부실한 상장회사의 경우 CB가 주총을 거치지 않고 이사회 결의만으로 특수 이해관계인에게 헐값으로 지분을 이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자체만으로도 배임 혐의가 입증된다는 논리를 폈지만 재판부는 `공모'의 고의성 등 보다 엄격한 혐의 입증을 요구한 셈이다.
검찰은 추가 자료를 제출할 것이 없고 주주들의 실권 과정은 입증이 어렵다고 거듭 입장을 밝혔다.
다음 재판은 다음 달 24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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