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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무협스타 왕우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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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무협스타 왕우를 기억하십니까?

[뉴스메이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로 내한한 왕우

홍콩 무협 영화계의 전설, 왕우가 한국을 찾았다. 제1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마련된 '왕우 특별전'에 참석하기 위해 부천을 방문한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인터뷰 내내 젊은이 못지않은 활력과 열정을 발산했다. 장마비가 질기게도 하루 종일 계속되던 지난 16일 밤, 왕우를 만났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 며칠간 계속된 인터뷰에 지칠 법도 하지만 왕우는 밝게 웃으며 첫인사를 건넸다. 왕우는 '전설'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으로 한 첫인사, 악수로 나눈 두 번째 인사에 이어 왕우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너무 많은 이들을 만난 탓에 명함이 다 떨어져 복사해 만든 '급조'된 명함이었다.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한다는 그는 과거에는 영화판을 뒹굴며 사람을 만났고, 지금은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부천에서 만난 젊은 관객들만큼 기쁜 만남도 드물 것이다. "기분 좋고 감사하지. 38년도 더 지난 영화를 보고, 환호해주니까. 일생 다해야 38년 못사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지."
왕우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한국의 젊은 관객들에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우는 홍콩 무협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60, 70년대 쇼 브라더스에서 활동하며 장철 감독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무협 액션영화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소룡, 성룡 이전 시대 최초의 범아시아 액션 스타였다. 또한 연기는 물론 연출까지 겸한 <용호의 결투>(1970)는 맨손 액션이 주가 되는 '권격' 영화의 효시와 같은 작품이다. 이소룡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수많은 영화인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액션의 대가이기도 하다. - 홍콩 무협 액션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지만 액션배우가 된 건 우연한 '사건'에 더 가깝다고 들었다. "원래 수영선수였다. 수구를 하다가 상대 선수와 싸움이 벌어져 징계를 먹고 선수 생활을 잠시 쉰 적이 있다. 그때 마침 쇼 브라더스에서 전속 배우를 구한다는 광고를 봤다. 거의 3천여 명이 지원했다더라. <금연자>에 같이 출연한 나열과 단 둘이 뽑혔으니 거의 1500: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다. 그게 1964년 일이다." - 이후 계속 액션 배우로 활약했다. 액션 연기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다. "원래 9살부터 15살까지 무술을 했다. 당시 70세 할아버지가 무술선생이었는데 딸은 활을 쏘는 사람이라 무술과 활쏘기, 둘 다를 6년 가까이 했다. 그러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지. 내가 워낙 싸움을 좋아한다.(웃음)" - 쇼 브라더스에서 장철 감독과 주로 작업했다. "시험 봤을 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장철 감독이었다. 액션 실기시험과 표정연기 등을 보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다. 당시 거의 신인이었던 장철 감독과는 <호협섬구>(1966)를 시작으로 함께 많은 작업을 했다. 특히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는 홍콩 영화계 최초로 백만불이 넘는 흥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왕우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장철 감독의 연출이 어떤 면에서 좋았나. "당시 무술영화들은 모두 고리타분했다.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거의 다 똑같은 무술영화들이었지. 장철 감독은 '신파(新派) 무술'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액션, 신선한 액션을 만들어냈다. 액션 뿐만이 아니라 편집 등의 영화 미장센을 이전 것과 완전히 다르게, 새롭게 만들어낸 감독이다." - <용호의 결투>를 시작으로 배우를 넘어 연출까지 했다. 감독이 되고픈 마음은 원래 있었나. "글쎄. 일정 정도의 수준이 되면 누구나 감독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연기는 매우 능동적인 영역이지만 어떻게 보면 또 매우 피동적인 역할이다.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연기를 해나가며 강해진 것 같다. 그래서 연출을 했지." - <용호의 결투>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액션, 맨손으로 싸우는 권격 영화를 만들었다. 액션영화계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시대극을 배경으로 '검'을 이용한 액션을 했지. 사극에 좀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냥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검이 아니라 그냥 주먹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액션, 한국의 태권도나 일본의 공수도 같은 것 있지 않나. 그래서 <용호의 결투>가 나왔다. 이후 이소룡을 비롯해 권격 영화의 붐이 일었지. <용호의 결투>는 감독 데뷔작이자 쇼 브라더스에서 만든 마지막 영화기도 하다." - 이후 골든 하비스트에서 활약했다. 쇼 브라더스를 떠나 골든 하비스트로 간 건 왜 인가. "골든 하비스트 회장이 '추문희'라고 원래 쇼 브라더스 부회장이었다. 그 분이 골든 하비스트를 차려 독립했지. 개인적으로 정말 친한 분이었다. 원래 내가 정에 약하다. 쇼 브라더스 회장은 배우들과 인간적 친분이 없었다. 그래서 친한 사람을 따라 골든 하비스트로 갔다." - 당신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히어로보다는 '안티 히어로'에 더 가깝다. 외팔로 싸운다던가 피를 뒤집어쓰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던가. 약한 영웅의 이미지, 어떻게 나온건가. "싸워도 팽팽한 긴장감이 있어야 맛이지, 주인공이라고 너무 잘 싸우면 그게 맛이 나나.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긴장감 있게 팽팽히 싸우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잘 죽지는 않는다. <금연자>도 그렇고 끈질기게 살지 않나. 당시에는 영웅이 죽는 걸 관객들이 싫어했다.(웃음)" - 이소룡은 물론이고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해 수많은 배우, 감독들이 당신에게 오마주를 바친다. 기분이 어떤가. "액션 배우, 감독으로서 체면이 선다고 할까.(웃음) 영화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보고 배우고 그렇게 해서 또 발전하고. 내 영화와 내 액션을 보고 후배 영화인들이 보고 배우고 또 새롭게 채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주성치가 내게 그런 면에서 참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선배 영화인으로서 기분 좋은 일이다." - 영화계를 떠난 지 10여 년 쯤 됐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왕우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요즘도 무술을 하나. "다 늙어서 무술은 무슨.(웃음) 그래도 운동으로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다. 아침에 120개, 저녁에 80개. 하루 200개는 꼭 한다.(왕우는 인터뷰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가서 직접 팔굽혀 펴기를 해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인터뷰 내내 무술과 마술을 선보여 기자를 놀라게 했다.) - 혹시 비장의 카드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없나. "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자주 출장을 다니는데 비행기 안에서 요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만 다 되면 영화로 만드는 건 금방이다.(웃음)" - 조금이라도 내용을 알 수 없을까? "<독비권왕>(1971)의 속편쯤에 해당하는 영환데, 승려가 죽고 그 후배가 복수를 떠나는 내용이다. 복수를 하려면 꼭 심장을 찔러야 한다. 문제는 복수하려는 자의 심장이 왼쪽 가슴에 붙어있지 않고 온 몸을 떠돌아다닌다는 거지. 마치 옛날 이야기 중에 토끼의 간처럼 말이다.(웃음)" - 그럼 다음엔 그 작품으로 한국을 찾을 건가? "음. 다음에 한국에 오면 꼭 새로 연마한 '마술'을 보여줄테니 기대해달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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