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다 히데오의 일본 공포영화 <검은 물 밑에서>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다크 워터>가 극장 개봉 없이 DVD로 출시됐다. 원작의 빈틈을 메우면서 심리 스릴러로 재탄생한 <다크 워터>를 소개한다. – 편집자 주 |
할리우드는 소재 빈곤에 허덕이는 가운데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이면서 새롭게 각색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 공포영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꽤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링>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미국판 <링>(2002)과 <링 2>(2005), <주온>의 리메이크 버전인 <그루지>(2004) 등은 모두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면서 일본 호러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들은 미국 공포영화 전통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공포영화에서는 오래도록 슬래셔 영화나 스플래터 고어 영화, 또는 몬스터 영화와 좀비 영화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거나 일상적인 공간과 사물이 원귀에 의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그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소름 돋게 만드는 일본 공포영화가 미국인들의 눈에 신선해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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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 ⓒ프레시안무비 |
지금도 할리우드는 여전히 아시아 공포영화 리메이크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다. 태국 팡 브라더스의 <디 아이>가 미국판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있으며, 우리영화 <장화, 홍련>은 데미 무어 주연의 <하프라이트>를 연출한 크레이그 로젠버그 감독이 시나리오를 각색중이다. 이번에 출시된 <다크 워터>는 나카다 히데오 감독이 스즈키 코지의 단편소설 '부유하는 물'을 스크린에 옮긴 <검은 물 밑에서>(2002)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중앙역><모터싸이클 다이어리> 등의 드라마로 실력을 인정받은 월터 살레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사실 스릴러나 공포 장르는 월터 살레스의 '주전공'이 아니다. 비록 그의 데뷔작 <그랑 아르테 A Grande Arte>(1991)가 스릴러이긴 했어도, 우리는 그간 월터 살레스의 깊은 시선이 돋보이는 휴먼 드라마에서 감명을 받아왔다. 한데 <다크 워터>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을 무력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 사회계급적 환경에 눈을 돌리다 먼저 원작인 <검은 물 밑에서>를 상기해보자. 이 영화는 이혼한 뒤 양육권 분쟁 소송중인 여성 요시미(구로키 히토미)가 어린 딸을 데리고 허름한 아파트로 오면서 시작된다. 아파트 3층의 새 집에 이사온 모녀는 나날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딸 이쿠코가 갑자기 사라지고, 천장에서는 물이 새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빨간 가방이 자꾸만 모녀의 눈에 띈다. 유치원에 입학한 이쿠코가 어린 소녀의 혼령을 보면서 기절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요시미는 이 유치원에 다녔던 노란색 비옷을 입고 빨간 가방을 멘 소녀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가 유아 실종 전단지에 인쇄돼 있던 그 소녀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모녀가 이사온 아파트 윗층에 살았던 그 소녀는 엄마가 가출한 뒤 외로워 하며 불의의 사고로 죽어 이승을 떠돌던 영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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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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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 밑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을 공포의 매개로 삼고 있다. 아파트의 물탱크와 하루 종일 내리는 장맛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과 상수도에서 역류하는 머리카락 등 생활 속에서 익숙한 소재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영화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롭게 죽어간 아이의 영혼이 아파트를 떠돌아다닌다는 설정 아래, 두려움과 연민을 동시에 일으키는 순간들을 연이어 보여준다. 죽은 아이의 원귀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 이쿠코에게서 요시미를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나카다 히데오는 <링>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서늘하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한편, 소름끼치는 원귀를 등장시켜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소녀의 원귀가 엘리베이터 안의 요시미에 달라붙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다크 워터>의 내용과 설정은 원작과 같다. 남편(더그레이 스콧)과 이혼한 달리아(제니퍼 코넬리)는 딸 세시와 함께 맨해튼 외곽 루즈벨트 아일랜드의 낡은 아파트 9층으로 이사를 온다. 한데 아파트 천장에 생긴 검고 둥근 자국이 점점 커져가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검은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건물주인 머레이(존 C. 라일리)와 아파트를 지키는 수위 비크(피트 포슬트웨이트)는 모두 달리아의 항의에 무심하다. 달리아는 바로 윗층인 10층의 빈집이 거의 흉가로 돌변한 상황에서 욕실 하수구가 역류해 검은 물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세시는 유치원에서 상상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달리아는 변호사 제프(팀 로스)의 도움을 받아 양육권 분쟁 소송을 진행한다. 일단 <다크 워터>는 공포물이 아니라 심리 스릴러에 가깝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섬뜩한 원귀의 이미지와 깜짝 놀래키는 쇼크 장면들을 배제하는 대신, 주인공인 달리아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 원작에서는 요시미의 과거가 현재의 사건과 그리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는 반면, <다크 워터>에서는 달리아가 자신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경험한 트라우마가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달리아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10층의 폐가에서 경험하는 그녀의 판타지 시퀀스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또한 영화는 원귀가 되어 떠돌아다니는 어린 소녀의 사연 역시 더욱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이 역시 <검은 물 밑에서>에서는 단서만 주어진 채 더 이상 심화되지 않은 부분이다. 공포영화라는 특정 장르의 관습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원작의 창조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성공적인 각색이다. 특히 <다크 워터>는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 배경에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루즈벨트 아일랜드는 맨해튼과 달리 경제적으로 하위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맨해튼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단조롭고 괴괴한 건물들이 일률적으로 배치된 유령 마을 같은 곳이다. 월터 살레스는 단순히 허름한 아파트와 그곳에 얽힌 과거의 사연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소득에 따라 계층화되어 있는 도시의 주거 공간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크 워터>의 공간은 <검은 물 밑에서>의 공간보다 더욱 생생한 리얼리티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다크 워터>는 원작보다 훨씬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더욱 축축하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경제적, 사회적 곤경에 처한 주인공 달리아가 경험하는 심리적 압박은 그만큼 더욱 심각하게 느껴진다. 진짜 무서운 것은 원귀가 되어 나타난 어린 아이의 유령/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속 개인의 삶을 옥죄는 생활 환경과 사회적 상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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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 ⓒ프레시안무비 |
. 핵심적 주제는 바로 '소외' <다크 워터>의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현대인의 소외'일 것이다. 물론 원작도 버려진 아이를 통해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다크 워터>는 등장인물 모두에 특정한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이 주제를 더욱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건물주 머레이 씨는 9.11 테러 당시 가족을 잃은 것으로 설정되며, 달리아의 변호사도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제니퍼 코넬리의 묵직하면서도 집중도 높은 연기력, 여타 조연 배우들의 탄탄한 호흡이 영화에 한결 품위를 불어넣는다. <다크 워터> DVD는 영화의 제작과정을 설명한 다양한 보너스 피처를 담고 있다. 상세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연출 의도와 공간에 대한 설명, 세트 제작 과정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사운드 효과가 뛰어난데, 이 역시 '공포의 소리(The Sound of Terror)'라는 제목 아래 따로 묶어 사운드 디자인 과정을 자세히 담았다. 데이비드 린치의 예술적 동지인 영화음악가 안젤로 바달라멘티가 맡은 음악은 이 남다른 소리의 향연에 더욱 무게감을 불어넣는다. '다크 워터 장면분석'은 영화에서 나름대로 무서운 세 개의 장면을 자세히 설명한 부가영상이다. 특히 클라임맥스 욕실 장면에 대한 설명은 <검은 물 밑에서>와 결정적으로 차이 나는 장면인 만큼 흥미를 더한다. 공포영화의 장르적 쾌감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다크 워터>는 얼마든지 더 풍성한 독해를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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