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사랑에 서툰 나이. 그리고 서른넷, 삶이 너무 익숙해 오히려 삶이 버거운 나이다. 아린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는 영화 <좋아해>에서 미야자키 아오이는 열일곱의 '유'를 연기한다. 강둑에 앉아 기타를 서툴게 퉁기는 같은 반 친구, '요스케'를 좋아하지만 '좋아해'란 말은 좀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건 요스케도 마찬가지다. 서툰 첫사랑의 시간은 그렇게 더디 흘러간다. 유와 요스케가 함께 앉아 있던 강둑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물처럼. 그후 17년. 요스케는 음반 회사에서 일하는 서른넷의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기한 서른넷의 요스케는 사랑의 설렘도, 일상의 새로움도 없는, 익숙하고 익숙해 오히려 닳아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런 그 앞에 어느 날, 유가 나타난다. 열일곱의 소년과 소녀는 17년의 세월을 넘어 그렇게 서른넷의 모습으로 다시 만난다. 미야자키 아오이가 열일곱의 유를,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서른넷의 요스케를 연기했으니 사실 영화 <좋아해>에서 두 사람은 같이 호흡을 맞추지 않았다. 그들은 각기 열일곱의 요스케(에이타 분)와 서른넷의 유(나가사쿠 히로미 분)와 연기했다. 그러나 둘의 인연은 깊다.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 작업을 함께 한 경험이 있고, 지금은 NHK의 아침드라마 <순정 키라리>에서 열연하고 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순정 키라리>에서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미야자키 아오이가 연기하는 '사쿠라코'의 정신적 지주인 화가로 등장한다. 드라마 촬영으로 둘은 요즘 거의 매일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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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아오이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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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즐거운 터닝 포인트, 미야자키 아오이 지난 3월, 국내 개봉한 <나나>에서 깜찍한 '나나'로 분한 미야자키 아오이는 스물한 살 깜찍한 배우다. 그러나 네 살부터 연기를 시작했으니 어엿한 중견 배우이기도 하다. 17년 시간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현장을 누빈 베테랑 연기자지만 미야자키 아오이에게선 배우 이전에 그저 앳된 소녀 같은 느낌이 먼저 풍긴다. 눈부터 미소가 차기 시작해 얼굴 전체로 둥글게 웃음이 퍼지는 얼굴은 영락없는 귀염둥이 소녀.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에 귀를 기울이거나 골똘히 답을 생각하는 모습은 귀여운 동시에 진지하고, 고민 끝에 뱉은 대답엔 신중함이 한껏 묻어나 있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2000)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005), 오타니 켄타로의 <나나>(2005) 등 영화마다 자신만의 매력을 덧붙여 표현해내는 배우 미야자키 아오이. 그저 즐거워 연기한다는 그녀를 배우로 각인시킨 건 그녀가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의 <해충>으로 2002년 프랑스낭트3대륙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순간부터였다. 미야자키 아오이는 <해충>에서 잔혹한 삶의 면면을 견디는 열세 살 소녀를 잔혹하리만큼 리얼하게 묘사해냈다. 어린 나이에 큰 상을 받은 경험이 연기하는 데 부담이 될 법도 하건만 미야자키 아오이는 "상이란 연기가 다 끝난 이후에 누군가에게 듣는 일종의 칭찬"일뿐 다른 의미는 전혀 없다고 설명한다. 연기를 대하는 마음을 바꾸는 건 '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에서 느끼는 여러 순간들이라고. 영화 <좋아해> 촬영을 포함해 최근 1, 2년 사이, 미야자키 아오이는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쯤 바뀌었다. 감독이 알려주는 대로 연기한 게 아니라, 감독이 상황을 만들어주면 그 안의 감정 연기를 모두 '스스로 찾아'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도 대사도 없었어요. 그저 상황을 알려주면 저와 요스케를 연기한 에이타 군의 감정대로 연기했습니다." 평소 배역과 실제 자신 사이에 동질감을 찾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미야자키 아오이는 <좋아해>에서 만큼은 철저히 '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촬영장에서 에이타 군과 이야기하고 놀면서 내가 '유'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항상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감정'을 스스로 골라내고 다듬은 덕분에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의 <좋아해>는 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연기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연극 <별의 왕자님>을 공연했어요. 배우들 가운데 가장 어렸는데, 제가 연극의 대부분을 다 끌어가야 했죠. 그때 그저 즐거워서 연기하던 것과는 다른,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좋아해>를 통해 연기자로서 한 뼘쯤 자라난 것 같다는 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은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을 입힐 줄 아는 배우"라는 '칭찬'을 전했다. 상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서툴지만, 그 어떤 것보다 벅차고 아픈 첫사랑의 감정을 미야자키 아오이보다 더 섬세하게 표현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를 대하는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연기'법'을 경험하게 해준 <좋아해>를 그래서 미야자키 아오이는 참 좋아한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 영화를 한국 관객들과 함께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한가득 넘쳐났다.
. 인생의 행복한 인연 맺기, 니시지마 히데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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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히데토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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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좋아해>에 참여한 사연은 그저 '인연'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의 전작 <도쿄 소라>에 출연한 적 있는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열일곱의 유와 유스케의 이야기에 카메오 등장한다. 저 멀리, 강둑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2, 3초 동안 등만 잠시 나왔다 사라지는 역이다. 그날 촬영이 끝나고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은 니시지마 히데토시에게 서른넷의 '요스케'를 연기해줄 것을 부탁했다. 열일곱의 요스케와 묘하게 닮은 동시에 다른 느낌을 그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말하는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의 연출법은 독특하다. 우선, 그는 시나리오 없이 작업한다. 상황만 배우들에게 던져주고 대사도 대부분 배우들이 처리한다. 배우들의 감정 이입을 돕기 위해서인지 '액션' 사인 전에는 배우와 말도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 진행 순서대로 차근차근 찍는다. 열일곱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서른넷을 연기할 배우가 정해지지 않은 건 이런 탓이다. 그리고 작품을 선택할 때 오로지 '감독'만이 선별 기준인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좋아해>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탓이다.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의 독특한 연출법이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저는 캐릭터나 이야기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감독이 누구냐가 가장 먼저죠. 어떤 스타일로 작업하느냐, 어떤 이들과 관계를 맺고 일을 하느냐, '인연'이란 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돌스><메종 드 히미코> 등으로 국내 관객과 만난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인연'을 바라보는 눈은 참 맵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간 합격>(1998),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2002), 시오타 아키히코의 <카나리아>(2004), 이누도 잇신의 <메종 드 히미코>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튼튼한 연출력을 자랑하는 작품들이다. 그 속에서 자신이 맡는 역할의 무게는 중요치 않다. 주연으로 때론 조연으로 어떨 땐 그저 목소리만이라도, 좋은 인연과 인생의 한 순간을 멋지게 보낼 수 있다면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어떤 인물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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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야자키 아오이'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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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스><메종 드 히미코><임신 36개월><좋아해>까지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항상 표정을 지우고 서 있다. 무표정 안에 세밀한 표정들이 꿈틀대지만 쉽사리 감정을 터트리거나 분출하지 않는다. "영화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 혼자 성격을 분출해내는 것보다는 그 인물이 서 있는 공간,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 이런 수많은 부분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관계를 맺는 거지요." 영화 안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니 표현이 점점 세밀하게 변해간다는 니시지마 히데토시. 이시카와 히로시 감독은 그런 그에게 '무색 無色의 매력'이 넘쳐나는 배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 <좋아해>는 그의 세밀하게 변화하는 표정들이 풍부하게 담긴 또 하나의 '인연'의 결과물이다. 평소 '인연'을 중시하는 그에게 한국도 좋은 인연 가운데 하나다. 한국 방문은 처음이지만 한일 합작 영화 <라스트 씬>(2002)을 찍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제작 분야에만 국한된 합작영화였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연으로 남았다.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영화 <나쁜 남자>와 <섬>을 좋아해 김기덕 감독에게도 큰 호기심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인연의 폭이 어찌나 넓은지 작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무표정을 그리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니시지마 히데토시. 아마도 그의 영화로 인연 맺기는 앞으로도 한동안 풍성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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