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관한 일은 어지간하면 다 뉴스가 된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삼성이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이학수 삼성 부회장 다룬 기사, 왜 삭제됐나?
그런데 가끔 예외가 있다. 이학수 삼성 부회장에 관한 기사를 중앙일보 출신 사장이 임의로 삭제하면서 불거진〈시사저널〉사태가 여기에 속한다.
19일 발매된 〈시사저널〉 870호 60쪽에서 62쪽 사이에 실리기로 돼 있던 "2인자 이학수의 힘, 너무 세졌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삭제됐다. 이철현 〈시사저널〉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이 오래 근무했던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들이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에 다수 포함돼 있으며 최근에는 이 부회장이 실장을 맡고 있는 삼성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재무팀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2인자로 꼽히고 있으며 그룹 내의 대표적인 재무통으로 알려져 있다.
금창태 〈시사저널〉사장은 "팩트(사실)를 왜곡하고 있어서 기사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 했으며, 기사에 언급된 삼성 경영진에 대한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기사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사저널〉기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해당 기사는 편집국에서 충분한 검토 끝에 객관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판단됐다는 것이다. 또 금 사장이 기사를 삭제한 이유는 기사의 질 때문이 아니라 이학수 부회장과의 개인적인 친분(고려대 선후배)과 중앙일보에 근무하면서 삼성과 맺은 인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기자들은 금 사장이 평소 "언론사가 어려울 때 기댈 곳은 삼성밖에 없다"라고 종종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유력한 광고주인 삼성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기사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기사가 삭제된 직후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은 사의를 표했고, 다음날 금창태 사장은 사표를 즉시 수리했다. 안철흥 언론노조 <시사저널> 분회장은 "이번 사건은 삼성이 관련 기사를 빼려고 금 사장에게 로비를 벌였고, 삼성 계열사였던 중앙일보 출신인 금 사장이 일방적으로 기사를 삭제한 것"이라며 "사장은 퇴진해야 하며, 삼성이 광고를 무기로 언론사에 압력을 넣은 행위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에 민감한 언론, 이번에는 잠잠
상황이 이쯤 되면 상당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법하다. 특히 기자들 사이에서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다룬 언론매체는 의외로 적다. 〈프레시안〉, 〈경향신문〉,〈오마이뉴스〉,〈미디어 오늘〉,〈기자협회보〉,〈프라임경제〉,〈mbn〉 등이 이번 사태를 기사화했다.
〈연합뉴스〉는 "S그룹 기사 삭제를 놓고 〈시사저널〉편집국 기자들이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짧게 보도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다른 매체에서 이번 사태가 기사화된 뒤에 나온 것임에도 기사에 삼성이라는 이름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기자들이 취재를 안 한 것은 아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시사저널〉의 기자들이 탄복할 만큼 꼼꼼하게 이번 사태를 취재했다. 하지만 이 일간지는 아직 <시사저널> 사태에 관한 기사를 싣지 않고 있다. 왜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언론사 내부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 차원에서 취재했지만 기사로 다룰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기사화하기에 적절한 시점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김유진 협동사무처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언론의 소극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처장은 "삼성에 관한 일은 아주 시시콜콜한 것도 크게 다뤄 온 언론이 막상 거대 자본의 힘이 편집권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언론이 이번 사태를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처장은 〈시사저널〉사태에 대한 언론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면, 이번 사태는 언론의 편집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이제는 정치권력이 아닌 거대 자본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과연 거대 자본은 어떤 방식으로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다음은 〈시사저널〉 이철현 기자가 15일 오후 이학수 삼성 부회장에 관한 기사를 작성한 뒤 17일 새벽 기사가 최종 삭제되기까지 35시간 동안의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언론이 거대 자본, 특히 삼성에 불리한 기사를 작성하고 내보내는 게 왜 어려운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15일 삼성관련 기사 탈고, 두 시간 뒤 삼성 전략기획실 전무가 찾아 왔다
15일 오후 2시께 이철현 기자는 기사를 탈고하고 마지막 검토에 들어갔다. 이 기자는 삼성 전략기획실에 전화를 걸어 기사 내용을 설명했다.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 인사 문제를 다룬 이 기사가 삼성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삼성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기자는 자신의 기사에 대한 삼성 측의 공식적인 견해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전화를 받은 삼성 전략기획실 이 모 차장은 "윗분과 상의해서 답하겠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대답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이철현 기자는 삼성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자신의 기사를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에게 넘겼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오후 4시 10분께 삼성 관계자가 <시사저널> 편집국을 찾아왔다. 삼성 전략기획실의 임 모 전무와 이 모 차장이었다. 이철현 기자는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서 이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임 전무는 "(이 기자의 기사 내용이) 삼성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다. 잘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기자는 "이미 데스크에게 넘긴 기사를 뺄 권한은 나에게 없다"고 대답했다.
이철현 기자가 커피숍을 빠져나올 때쯤 〈시사저널〉사장실의 전화가 울렸다. 삼성 전략기획실 관계자의 전화였다. 이 대목에서는 기자들과 금 사장의 진술이 엇갈린다. 금 사장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차장급 인사가 전화를 했다"고 이야기했다. 〈시사저널〉기자들은 이순동 삼성 전략기획실 부사장이 전화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철현 기자는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금 사장에게 겨우 차장급에 불과한 사람이 전화를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금창태 사장은 이윤삼 편집국장을 6층 사장실로 불러올렸다. 금 사장은 이학수 부회장(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의 영향력을 다룬 이철현 기자의 기사를 발행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금 사장은 해당 기사가 충분한 사실적 뒷받침이 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때 이윤삼 편집국장은 "기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기사를 보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답했다.
기사삭제의 이유, 과연 함량미달 때문인가?
잠시 후 금 사장은 이철현 기자를 6층 사장실로 호출해 "이학수 부회장은 내게 대학(고려대) 후배다. 서로 도움을 많이 주고 받았다. 기사 좀 빼자"라고 말했다. 이철현 기자는 기사를 빼는 문제는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이날 사장실에서 나눈 대화에 대해 금 사장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철현 기자의 기사는 객관적인 팩트(사실)의 뒷받침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해당 기자에게 직접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사의 수준에 대한 나의 판단을 이윤삼 편집국장에게 전했다.
이철현 기자의 자존심을 배려하면서 기사 삭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이학수 부회장과의 인간적인 관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단지 이 부회장과 대학 선후배 사이라는 이유로 기사를 뺐다는 주장은 억지에 다름 아니다."
한편 이철현 기자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사저널〉은 지금까지 삼성에 관한 기사를 여러 차례 다뤄 왔다.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 구조조정본부를 정면으로 다뤘을 때도 삼성 측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소대장보다 바로 윗 고참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건희 회장을 다룬 기사보다 이학수 부회장에 관한 기사가 더 예민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본다. 삼성그룹의 실질적 2인자이면서도 언론에 덜 부각되었던 이학수 부회장의 문제가 기사화되자 아랫사람들이 과잉충성을 한 것 같다.
여기에 현 〈시사저널〉사장과 이 부회장의 친분이 맞물리면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기사의 수준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집요하게 찾아온 삼성 관계자 … 편집국 "기사는 이대로 나간다"
오후 5시께 장영희 취재총괄팀장과 이윤삼 편집국장이 5층 편집국에서 마주앉았다. 장 팀장이 "기사 보내자(게재하자). 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윤삼 편집국장은 "그렇게 하자"라고 대답했다.
한 시간 뒤인 오후 6시께 이윤삼 편집국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앞서 찾아왔던 삼성 전략기획실 임 모 전무의 전화였다. 임 전무는 "이번 기사는 이건희 회장 관련 기사보다 우리에게는 더 아프다. 기사를 빼줄 것을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거절했다.
오후 7시 30분께 이윤삼 편집국장이 장영희 취재총괄팀장, 김은남 취재2팀장과 회의를 열었다. 김은남 팀장은 이철현 기자의 기사에 대해 "특종성 있는 내용을 담은 기사는 아니지만 삼성 내부에서 이견이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충분히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라고 말했다. 다들 동의했다.
잠시 후인 오후 8시께 삼성 임 전무가 다시 이 국장에게 전화했다. 이 전화를 끝으로 이 국장은 더 이상 삼성 관계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밤 10시. 이번에는 이철현 기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삼성 전략기획실 이 모 차장이었다. 이 차장은 "기사를 뺄 수가 없으면 (기사의 게재를) 미룰 수는 없나?"라고 물었다. 이 기자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노골화된 기사삭제 압력…16일 밤 경영진 비상회의 열려
하루가 지났다. 16일 오후 3시. 다시 이철현 기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의 전화였다. 〈시사저널〉은 1998년 경영악화로 1차 부도를 맞은 뒤 이듬해 서울문화사에 인수합병됐다.
심 회장은 전화를 통해 "기사 내용이 인사에 관한 것이라면 빼는 것이 어떠냐? 인사라는 것이 원래 잡음이 많은 것이고 사기업의 인사 내용이라면 기사화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기자는 심 회장의 제안을 거부했다.
오후 6시. 심 회장은 이 편집국장에게 전화해 같은 내용을 전했다. 이 편집국장은 "회장의 뜻을 알았으니 기자들과 상의해보겠다"라고 답했다.
이 시각 이후로 이 국장은 심 회장, 금 사장, 삼성그룹 측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이때부터 이 기자의 기사에 대한 삭제 요구가 더욱 거세지고 노골화됐다. 이 편집국장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삼성 임 모 전무가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을 찾아왔다. 오후 7시 40분께 장 팀장을 만난 임 전무는 "(기사에 거론된) 당사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벌일 수 있다. 삼성그룹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다. 기사를 뺄 것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에 장 팀장은 "나는 (편집과 관련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오후 8시.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이 서울 충정로에 있는 <시사저널> 본사에 들어왔다. 두 시간 뒤 경영진 비상회의가 열렸다. 심상기 회장, 금창태 사장, 박경환 상무, 현병구 광고팀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편집국장의 동의 없이 인쇄소에 연락해 기사를 광고로 교체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17일 새벽 1시, 편집국장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기사 삭제
오후 11시. 심상기 회장이 <시사저널> 본사를 나갔다. 오후 12시에는 이윤삼 국장과 장영희 팀장이 퇴근했다. 이때까지 두 사람 모두 경영진의 결정을 알지 못 했다.
한 시간 뒤인 17일 새벽 1시. 현병구 광고팀장(부국장 급)이 삼화인쇄에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인쇄소에서 〈시사저널〉의 인쇄를 담당한 사람은 삼화인쇄 양 모 과장이었다.
양 과장의 말에 따르면 현병구 팀장은 "이미 제작부서와 다 이야기가 되었으니 60쪽에서 62쪽 사이의 기사를 빼달라"고 요청했다. 양 과장은 별다른 이의 없이 기사를 삭제했다.
이학수 부회장을 다룬 기사가 작성된 지 35시간 만이었다.
기사삭제 이후…<시사저널〉, 노동조합 결성하다
19일 〈시사저널〉 870호가 발매됐다. 이학수 부회장에 관한 기사가 들어가기로 돼 있던 자리에는 <시사저널> 정기구독자 모집 광고와 현대모비스의 DMB 네비게이션 광고 등이 실렸다. 이날 오전 이윤삼 편집국장이 사의를 밝혔다. 그 다음날 '이윤삼 편집본부장 의원면직'이라는 내용의 인사발령이 편집국 알림벽에 붙었다.
〈시사저널〉 편집국은 '시사저널 편집권 수호를 위한 편집국 총회의'를 구성하고 22일부터 매일 두 차례의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왔다. 〈시사저널〉 기자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안철흥 기자는 금창태 사장의 퇴진이 이루어질 때까지 회사 측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사가 삭제된 채로 〈시사저널〉 870호가 발매된 후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26일 〈시사저널〉 871호가 나왔다. 편집국장이 공석이 상태에서 공동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작한 것이다.
〈시사저널〉은 871호 사고(社告)를 통해 "6월 27일자로 발간된 제870호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인쇄 사고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어 "내부 사정으로 이번 호 '편집국장의 편지'가 실리지 못합니다. 독자들께 널리 양해를 구하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29일 낮 12시. 〈시사저널〉편집국 임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시사저널〉분회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기사삭제 후 13일 만의 일이다.
안철흥 분회장은 "이제까지는 임의단체인 〈시사저널〉 기자협의회가 회사 측과의 교섭을 맡아 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기자협의회를 통해서는 편집권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회사 측과의 단체협상을 통해 편집권 독립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방식으로 보장받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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