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개표방송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가 겪었던 70년대 이후의 정치사는 언제나 정의롭고 양심적인 세력이 패배해 온 역사였기 때문이었고, 우리 스스로도 어느 샌가 그러한 패배의 반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80년 '민주화의 봄'으로 함께 일궜던 희망이 '광주의 참혹한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어 버리고 , 88년 '여소야대'의 희망이 '3당 합당'으로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한국의 정치변혁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비탄에 빠지기도 했다.
때만 되면 나타나는 구태의연한 색깔시비와 뿌리깊은 지역주의가 공룡처럼 버티고 서서 정치권에 맑은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계속 차단할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점점 현실 정치에 절망감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이제 정치변화나 사회개혁에 대한 희망은 버리고 돈 많이 벌어서 가정의 행복이나 추구하자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지난 50년 보수독점의 정치구도를 깬 돌파구**
노무현의 승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내 준 쾌거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무현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열혈 지지자들과 더 이상 색깔시비, 상대방 흠집내기, 지역주의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한 유권자들의 승리라 말할 수 있다.
노무현의 승리는 우선 고지식하게 원칙을 지키려는 정치가의 값진 승리이다.
노무현은 한국의 직업정치가로서는 사실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을 감행했다. 90년 3당 합당 당시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은 일이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당선이 거의 보장된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지역주의'에 맞서기 위해 부산에 출마한 일도 기억되어야 한다.
한국 정치가들 중 말로는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면서도 자신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을 노무현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한동안은 그에게 시련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국은 그를 최종적인 승리자로 만들었다. 한국 정치의 최대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가 이번 선거에서도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선은 지역주의 구도를 해체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전기가 될 것이다.
지역주의 외에 그는 두 개의 큰 성역을 깨트렸다. 하나는 영향력 있는 보수언론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전면전을 선포했다는 점이며, 한국 정치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들보다 어쩌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은 정당 조직이나 돈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 지지자들의 자원봉사의 동력에 결정적으로 의거하여 민주당 국민경선,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 그리고 대선을 치렀다는 점이다.
한국정치의 부패가 바로 선거자금 동원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당조직이 자발적 참여자의 조직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매체로 하여 이합집산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기성 정치와의 단절을 실천하고서도 그가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국 정치의 변혁이다.
이제 정치는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일반인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관념의 근본적인 혁신이며, 지난 50년 동안 지탱되어온 보수 독점의 정치구도를 깨는 돌파구라 볼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전쟁에서 미래가 과거를 이겼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대결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사회의 변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그것은 우선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후보가 은연중 지역주의에 호소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장이었으며, 안보와 남북의 군사적 대결보다는 남북화해와 평화 공존을 강조하고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정치가가 입지를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소외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온 후보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지난 3,4,5,6공화국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보수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후보를 이길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싸움터였으며, 인터넷 통신과 사이버 공동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수직적 사회관계에 익숙해 있는 기성세대가 지지하는 후보를 이길 수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였다.
김대중 정부가 그렇게 많은 실수를 범하고, 각종 부패 스캔들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의 적자인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가 흠집내기식 공격 이상으로 국민들에게 어떤 전진적인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국민경선 당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구태의연한 색깔시비에 흔들리지 않으며, 보수언론의 구태의연하고 노골적인 특정후보 편들기 보도태도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북핵문제 등 안보를 빌미로 한 위기조장에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이번 노무현의 승리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선거를 과거와 미래와의 전쟁에서 미래가 과거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회창 후보의 선거 구호 자체가 '부패정권 심판'이라는 상대방의 약점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낡은 정치 공세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제안에 대해 '집값 폭락'이라는 구호로 반격하면서 부자들의 위기의식을 조장하려는 수동적이고 퇴영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과거의 한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도 더 이상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우리도 이제 제국주의 지배, 분단, 전쟁, 군사독재로 얼룩진 지난날의 주름을 펼 때가 되었다. 지난 시절 마이너스의 역사를 이제 겨우 제로로 돌리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의 당선은 종착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퇴영적인 구 정치세력은 상당히 정리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제 정당은 새롭게 만들어지게 될 것이고, 지역주의를 청소한 마당에서 정책과 이념으로 무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 마당이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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