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기도 평택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2차대전 직후 일본 스나가와 마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51년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전토기지 방식'이 명시돼 있다. 일본 영토 어느 곳이든 미군이 원하는 곳이라면 미군기지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스나가와 마을 옆의 다치가와 미군기지 확장 계획이 발표됐다. 이와 동시에 스나가와 마을 주민들의 저항도 시작됐다. 1950~60년대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궜던 '스나가와 투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가메이 후미오 감독의 다큐멘터리〈스나가와 : 1956년 유혈의 기록〉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1960년대 일본사회에서 전개된 평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평택과 스나가와가 닮은 것은 딱 여기까지다. 1959년 동경지방재판소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 시위 도중 미군기지의 철조망을 자른 주민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하여 상급 법원에 상고했지만 최종심에서도 결국 2000엔 벌금형이라는 가벼운 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전평화 운동이 일본 곳곳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맞물린 것이다. 스나가와 마을 주민들도 끈질기게 싸웠다. 10년이 넘는 투쟁 끝에 1968년 12월19일 미공군사령부는 다치가와 미군기지를 스나가와 마을로 확장하려던 계획을 전면 중지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원래 있던 다치가와 미군기지마저 일본정부에 반환했다. 미군기지가 있던 자리에는 평화공원이 들어섰다.
평택 미군기지 문제도 스나가와의 경우처럼 풀릴 수 있을까?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맞서는 주민들의 투쟁에 동참했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은 최근호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일본 스나가와 농민들의 투쟁을 소개한 인하대 법학과 이경주 교수의 글을 실었다. 평택 미군기지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주는 이 교수의 글을 전재한다. 〈편집자〉
동경의 서부 다치가와(立川)라는 곳에 가면 쇼와기념공원(昭和記念公園)이라는 50만여 평에 이르는 방대한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주말이면 싸이클링객과 산책객이 한가로이 노닐고, 이름 모를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귄다. 야생화군락도 여기저기 펼쳐진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생태공원이다. 드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있는 아름드리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있노라면 이곳이 동양인지 말로만 듣던 서양의 가든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이국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주쿠의 교엔(御園)처럼 동경도 내의 많은 공원들이 사실은 천황가와 관련된 시설에다 공원 이름을 붙인 데 비하여, 이 공원은 노골적으로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인 쇼와를 붙인 공원이어서 외국인들이 처음에는 주저하는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공원의 유래를 알고 나면 사실은 생태적 매력뿐만 아니라 평화운동의 힘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더 발길을 옮기고 싶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사실 이 공원은 소화천황 재위 50주년을 기념하여 소화기념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시민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별칭은 '평화공원'이다. 그것은 이 공원이 소화천황의 하사품이 아니라 이곳 다치가와 시 스나가와(砂川) 마을 주민들과 이를 지원하였던 동경도민의 10여 년에 걸친 평화운동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농사 짓다 쫓겨날 위기에
요즘 우리나라 평택에서도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한창이다. 여느 평화 운동과 달리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열심인 것도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말하자면 범부중생이 주한미군 재배치라는 거대담론에 맞서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이 평택의 범부중생들이 제일 기구해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평화롭게 농사지으며 살고 싶은데 잘난 나라님들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군사기지가 만들어지는 바람에 내몰리고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 때문에 내몰렸던 이들이 또 다시 미군기지가 확장되면서 평화적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지가 확장되면 이 나라가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함께 나온다.
일본의 스나가와 마을에서도 그랬다. 다치가와 미군비행장 옆에 자리한 스나가와라는 조그만 마을의 범부중생들도 패전 전에는 제국군대의 기지로, 패전 후에는 미군기지에 내몰려 평온하게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미군기지 확장 때문에 농사를 짓다 쫓겨나는 기구한 팔자였다. 기구한 팔자만 탓할 수 없어서 철책선 앞에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10여 년에 걸쳐 싸웠다.
기지확장에 맞선 10년간 싸움 시작되다
10여 년에 걸친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57년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일본정부와 미국정부는 태평양지역 있어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일본에 외침이 있을 경우 미군이 공동대응한다는 게 형식논리였지만, 실질은 미군의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일 정부는 주일미군의 군사력, 특히 공군력의 태평양 일대에서의 제공권 제고를 위하여 미군기지 확장을 서둘렀다. 전토기지 방식, 즉 일본 땅이라 하더라도 미군이 원하는 일본 전역에 미군기지를 둘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협정이었던 탓에 미군의 요구에 따라 니이가타, 다치가와, 요코타 등 미군이 원하는 곳에 미군기지 확장 계획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패전 전후 몇 번이나 군대 때문에 토지를 수용당했던 범부중생이 잠자코 이를 수용할 리 만무했다. 마을 주민들은 수 차례에 걸쳐 기지 확장을 위한 측량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런데도 동경도가 이를 강행하자 가열차게 항의했다. 항의 도중 일부 주민은 철책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에 일본정부는 미일안보조약에 기초한 미일행정협정에 따른 형사특별법 제2조 위반으로 주민들을 기소하기에 이른다.
동경지방재판소 "철조망 훼손은 무죄"
그러나 동경지방재판소의 다테(伊達)판사는 1959년 3월 30일 이들에 대하여 전격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주일미군이 비무장평화주의를 규정한 일본헌법의 평화주의에 반하는 존재이고, 주일미군으로 인하여 무력분쟁에 휩쓸릴 가능이 높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또 미일행정협정에 따른 형사특별법 2조의 형벌이 경범죄처벌법보다 더 무거운 것은 헌법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미일안보조약 개악논의가 한창이던 터라 긴장한 검찰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최고재판소에 비약상고하였고, 최고재판소는 1심의 무죄선고를 파기하여 돌려보낸 결과 동경지방재판소의 다른 재판부에서는 1961년 3월27일 주민들에게 경미한 2000엔 벌금의 유죄를 내렸다.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이후 스나가와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은 때마침 활발해져가고 있던 전국 각지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맞물려 더욱더 공감대를 확산하였다. 결국 1968년 12월19일 미공군사령부는 다치가와 시의 미군기지를 스나가와 지역으로 확장하려던 계획을 전면 중지하였다. 그 후 1977년에는 확장하려던 다치가와 시의 미군기지마저도 일본정부에 반환하게 되었다. 그 기지 예정지의 대부분이 현재의 평화공원이 된 것이다.
각계의 주민 응원, 군수까지 토지수용 업무 거부
스나가와 투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각계각층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시작은 스나가와의 범부중생의 투쟁에서 출발하였지만, 미군기지 확장이 일본 민중의 평화적 생존을 저해하는 것임을 알고 정치인, 군수, 학생, 노동조합, 사회활동단체, 연구자 등이 손품과 발품을 보태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움막집을 파고 기거하면서 현지주민들을 응원하였고, 평화활동가들은 기지 주변에 텐트를 치고 기지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스나가와 마을의 군수는 토지수용에 관한 정부와 도의 위임사무를 일절 거부하고, 직무집행명령 위반 소송의 피고의 위치에 내몰리면서까지 과감한 재판투쟁을 벌이다 결국 과로사로 세상을 달리하기까지 했다.
2006년 6월, 평택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기구한 팔자 탓으로 내맡겨둘 것인가, 스나가와 마을의 노인들처럼 다시 밭을 갈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 기로에 서 있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7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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