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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영화, 환경문제를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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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영화, 환경문제를 가르치다

[김명진의 사이언스 인 무비] 〈시빌 액션〉

<시빌 액션>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번(Woburn)에서 실제 일어났던 환경소송 사건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우번은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인구 37,000명의 작은 도시인데, 이곳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15년간에 걸쳐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28명의 소아백혈병 환자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이것이 인근의 공장 부지에서 흘러나온 독성폐기물로 인해 수돗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했고 1979년 5월,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애버조나 강 인근 공터에 독성폐기물을 담은 수백 개의 드럼이 불법 매립된 것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심증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도시에 식수를 공급하는 우물에 인접한 대기업인 W. R. 그레이스 사와 비어트리스 식품을 오염원으로 지목해 소송을 제기했다. 영화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장장 10년을 끌었던 소송 과정을 우번 주민들의 소송담당 변호사였던 잰 슐릭만(존 트라볼타)의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다.
시빌 액션 ⓒ프레시안무비
<시빌 액션>은 기본적으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법정드라마 장르의 외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신출내기 변호사가 등장해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불의와 음모에 맞서 결국에는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주는 존 그리샴 류의 통상적인 법정드라마와는 달리, 이 영화는 현실 속에서 법적 절차와 정의가 종종 불화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본래부터 '정의'를 금지옥엽처럼 떠받들었던 인물도 아니며, 마지막에 '승리'를 얻어내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번 소송은 개인 상해사건 분쟁소송을 주로 맡아 왔던 슐릭만의 소규모 법률회사(변호사가 고작 3명에 불과한)와 미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있는 두 개의 법률회사(각각 수백 명의 변호사를 거느린)가 서로 맞붙은,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 만한 법정투쟁이었다. 이 대결에서 슐릭만의 법률회사는 파산 직전에 이를 때까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몇 곱절의 돈을 퍼부은 그레이스와 비어트리스 사를 법정에서 단죄하는 데 실패했고, 그레이스 사로부터만 8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후 조사를 통해 1심 재판 당시 중요한 증거가 은폐되었음을 알게 된 슐릭만은 비어트리스 식품에 대한 무혐의 판결에 항의해 항소법원, 대법원에까지 상고해 보았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화의 에필로그에도 나오듯이, 1990년대 들어 미 환경보호청(EPA)이 그레이스와 비어트리스 양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여 해당 공장을 폐쇄하고 향후 50년간 우번 지역의 오염을 정화하는 비용으로 6,940만 달러를 분담하는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수십 년간에 걸친 우번 주민들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 되었다. 이 영화는 논픽션 작가 조나단 하가 1995년에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의 작품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작가는 <시빌 액션>의 집필을 위해 무려 8년간의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법정소송 과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번 사건의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의 활동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고, 이러한 약점은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영화 <시빌 액션>에서 지역 주민들은 백혈병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나서 돈이 아닌 정의를 갈구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위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상당히 아쉬운 점인데, 왜냐하면 우번 사건에서 가장 눈여겨 볼 만한 점 가운데 하나가 문제제기부터 대중적 홍보, 연구 수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빌 액션 ⓒ프레시안무비
지역 주민들은 당국이 대수롭지 않게 다루던 식기 세척기의 변색과 수돗물의 나쁜 맛, 악취 문제가 소아백혈병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1972년에 처음 생각해냈다(지역 도서관 사서로 일했고 영화에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앤 앤더슨(캐스린 퀸란)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의 아들 지미 앤더슨은 1972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1981년에 사망했다). 1979년에 독성폐기물을 담은 드럼이 발견되어 사건이 공론화되자 그들은 FACE(For a Clean Environment)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자체적으로 신문 광고를 내어 백혈병 환자의 사례를 조사해 그 분포를 그려내는 한편 이를 근거로 지역 보건당국과 질병통제센터(CDC)의 공식 조사를 요구했다. 공식 조사 결과가 자신들의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자 그들은 하버드대 공중보건대학원의 몇몇 과학자들과 협력해 우번 지역에 대한 광범한 역학(疫學)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유해폐기물과 다양한 출산 및 유아기 이상(사산, 시력/청력 이상, 중추신경계/염색체/구강 이상 등)간의 관계를 규명해냈다. 이 연구에서는 235명의 지역 주민들이 간단한 교육을 받고 자원활동으로 참여해 우번 전체 인구의 57%에 해당하는 5,010가구에 대한 역학조사를 담당했다. 영화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법정소송의 배경에는 이미 이러한 성과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과 FACE의 공동연구는 처음에 관련 전문가 단체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일반인의 이해방식(ways of knowing)과 전문가의 이해방식의 차이를 드러내 주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독성폐기물 지역운동에 대해 다년간 연구해 온 필 브라운은 지역 주민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직접 참여해 역학조사를 수행한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대중 역학(popular epidemiology)'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통상적인 역학 연구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가령 대중 역학은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사회운동을 그 속에 포함하는 실천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대중 역학은 증거의 기준에 대해 덜 형식론적인 사고를 하는데, 특히 '통계적 유의미성'의 개념을 둘러싸고 기존의 역학 전문가들과 견해차이를 보이는 수가 많다. 이러한 우번 주민들의 활동을 두고 과학사회학자 대니얼 리 클레인맨은 '과학기술 민주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지식생산의 민주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영화에는 빠져 있는 이러한 부분들을 채워넣어 가면서 <시빌 액션>을 본다면 아마도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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