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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 그 끝없는 상상력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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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 그 끝없는 상상력의 세계

[김명진의 사이언스 인 무비] 〈브라질에서 온 소년〉

과학기술 논쟁 연구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고 1990년대 들어서는 생명공학의 사회적 차원을 다룬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다가 2003년에 타계한 도로시 넬킨은 1998년에 인간복제를 다룬 짧은 글을 하나 썼다. 돌리 탄생 1주년을 맞아 수전 린디와 함께 발표한 이 글에서 그녀는 1997년 2월 돌리 탄생 발표 직후에 등장한 다양한 반응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녀에 따르면 최초로 나타난 반응들은 주로 익살스런 농담이었다고 한다. 국내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었던, 마이클 조던 같은 뛰어난 운동선수를 복제해 다섯 명의 마이클 조던으로 구성된 농구팀을 만든다거나, 앨버트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를 복제해 되살린다거나, 혹은 토니 블레어처럼 인기있는 ― 당시만 해도 그랬는데 ― 정치인이나 빌 게이츠 같은 부유한 기업가를 복제한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그런 예들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의 건국 시조들을 복제해 전시함으로써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테마파크를 만들자거나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을 복제해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거나 하는 더욱 썰렁한 농담도 있었고, 교황을 복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불경스런' 질문도 있었다(과연 그 둘은 모두 무오류일까? 만약 그 둘이 의견을 달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이러한 농담과 아울러 복제의 미래를 둘러싼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제기되었다. 누군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나찌 광신자들이 아돌프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면 어떻게 될까? 혹은 '장기 수확'을 위해 인위적으로 무뇌아들을 공장에서 만들어내게 되지는 않을까? 등등.
넬킨은 이러한 반응들의 근저에 그녀가 '유전자 본질주의(genetic essentialism)'라고 이름붙였던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이 지닌 복잡성은 DNA라는 강력한 분자 텍스트를 단순히 읽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인간복제에 대한 매혹(혹은 공포)의 근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소설이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 텍스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여기서 소개할 <브라질에서 온 소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이라 레빈의 1976년 소설을 2년 후에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는 아직 체세포 복제 기술이 완성되기 훨씬 전이었지만, 1960년대를 통해 유전과 생식 과정을 조작하는 초기 실험들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고 「타임」지 기자인 데이빗 로빅의 가짜 논픽션인 <복제인간>이 막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시점이었다. 원작 소설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동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유명한 나찌 사냥꾼인 에즈라 리버만(로렌스 올리비에) ― 실존인물인 사이먼 위젠탈을 모델로 한 ― 으로, 그는 남미의 한 제보자로부터 과거 나찌의 핵심인물이었던 멩겔레 박사(그레고리 펙)가 북미와 유럽에 흩어져 있는 65세 남자 94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계획을 전해듣는다. 이 제보내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94명의 남자들이 모두 14살난 아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으며 그 아들이 모두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94명의 14살 소년들은 멩겔레 박사가 히틀러의 신체조직으로부터 복제해 대리모의 자궁에서 키워낸 복제인간으로, 히틀러의 성장환경과 유사한 조건에서 자라나도록 입양된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나찌 조직들은 심지어 히틀러가 14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죽었던 것까지도 그대로 재현해 주려 했던 것이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 ⓒ프레시안무비
이 영화의 설정은 공장에서 복제인간을 불과 수 일에서 수 시간(심지어는 수십 분)만에 '찍어내는' 것으로 나오는 <져지 드레드>나 <6번째 날> 같은 요즘 영화들의 'SF적' 설정에 비해 오히려 더욱 사실적이며 '교육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한편으로 유전자 본질주의적 전제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심지어 히틀러를 '되살려' 제3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나찌 잔당들조차도 ― 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영화 말미에서 음모의 주인공 멩겔레 박사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 유대인 자위단원과 리버만이 94명의 소년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토론할 때,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자위단원의 주장에 반대해 리버만이 소년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를 없애버리는 장면이다. 이는 유전적 형질보다는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에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설정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간복제를 둘러싼 현실에서의 토론에 구체적 함의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몸담고 있는 곳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신화'의 영역이며, 따라서 인간개체복제(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인간복제)와 배아복제(14일 이전의 복제 배아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연구)를 구분하고 이 중 배아복제와 배아연구의 윤리적ㆍ법적 쟁점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의 정책 상황과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 담긴 이미지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일반대중이 유전학과 유전자조작, 좀더 넓게는 과학과 그 응용 일반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과 우려의 일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대중, 그리고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대중매체들은 어떤 하나의 과학 실험을 그 자체의 가치에만 주목해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지 않으며, 이를 더 큰 맥락 안에서 조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인간복제의 문제는 종교나 신화, 우화를 포함한 다양한 상징적 연관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인종, 여성, 연구 부정행위 등을 포함하는 당대 사회의 쟁점들과 결부되어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보면 <브라질에서 온 소년>이 지닌 의의는 복제기술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응용을 20세기 사회를 뒤흔들었던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연결시켜 고찰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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