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에게 별명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플레이 스타일에서부터 용모와 성격까지 선수들의 진면목이 별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아서다. 월드컵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축구계의 별들에게도 재미있는 별명이 많다. 때로는 축구스타의 본명보다 별명이 더 많이 회자될 정도다. 유럽과 함께 월드컵을 양분했던 남미 축구의 양대 산맥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축구 스타 3명의 별명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 보자.
***기적을 일군 '축구 황제' 펠레**
'삼바군단' 브라질 축구의 대명사는 역시 펠레다. 브라질에 3번이나 월드컵 우승을 안긴 '축구 황제' 펠레의 별명은 펠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였다. 발명왕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하지만 그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유년시절부터 펠레의 축구 실력은 대단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펠레는 신이 내린 개인기로 믿기 어려운 골을 자주 만들어 냈다. 이 때마다 친구들은 그의 본명 대신 '펠레'라고 소리쳤다. 히브리어로 '기적'을 뜻하는 단어 펠레는 어느새 별명이 아닌 그의 이름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이 돼 버린 '펠레'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펠레'라는 소리가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전 하는 어눌한 말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펠레는 "친구가 나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나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일로 나는 이틀 동안 학교를 가지 못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펠레는 월드컵 무대에서 여러 번 '기적' 같은 골을 성공시켰다. 17세의 나이로 출전했던 1958년 스웨덴 월드컵 결승에서 펠레는 환상적인 기술로 두 골을 넣었다. 이 경기에서 펠레가 보여준 발리킥 골은 축구 역사상 가장 예술적인 골로 손꼽힌다. 펠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도 멋진 골을 넣었다. 펠레는 전반 18분 첫 골을 넣으며 철옹성 같아 보였던 이탈리아의 빗장 수비를 허물었다. 이 골은 축구를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펠레가 월드컵에서 넣은 마지막 골로 아직까지 많은 축구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펠레라는 별명은 1980년대 브라질 축구의 최고 테크니션인 지코에게 이어졌다. 현 일본 팀의 감독으로 있는 지코의 별명은 '하얀 펠레'였다. 펠레와 피부색은 달랐지만 지코의 개인기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지코는 브라질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국민의 기쁨' 가린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펠레가 부상을 당해 비상에 걸렸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가린샤가 있었다. 선천적으로 두 다리가 심하게 휘어졌지만 가린샤는 개인기의 화신이었다. 브라질의 전통 무예 카포에이라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그의 드리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축구 전문가들이 펠레가 아닌 가린샤를 축구 역사상 최고 테크니션을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린샤는 칠레 월드컵에서 디디, 바바, 아르마릴두와 함께 환상적인 공격라인을 이끌었다. 브라질 팀에서 가린샤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는 칠레와의 준결승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가린샤는 칠레와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브라질 감독은 훗날 "준결승에서 가린샤의 활약을 보며 펠레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반면 내심 결승진출을 기대했던 개최국 칠레는 준결승에서 패하자 슬픔에 잠겼다. 칠레의 한 일간지는 "도대체 가린샤는 어느 별에서 온 선수인가"라는 표현까지 쓰며 가린샤를 높게 평가했다. 가린샤는 39도의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결승전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었고, 브라질은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가 축구선수뿐만 아니라 사업가, 정치가 등으로 변신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힌 사람이었다면 가린샤는 그저 축구를 즐기며 뛰었던 선수였다. 가린샤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프로 팀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세어 보지도 않고 집에 있는 과일 바구니에 돈을 처박아 둔 채 술을 마실 때에만 돈을 한웅큼 집어 술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인생을 즐긴 가린샤에게는 축구 그 자체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 축구에 죽고 사는 브라질 국민들이 가린샤를 '국민의 기쁨'으로 부르는 이유다.
가린샤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드라마틱한 일생이다. 잉글랜드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에서 수모를 당했던 가린샤는 자동차와 술만 탐닉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가린샤는 브라질로 귀국한 뒤 자신의 장모를 태우고 가던 중 화물차와 충돌했고, 장모가 현장에서 숨지는 사고를 겪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자살 기도까지 했던 가린샤는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린샤의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부인이자 유명한 '삼바 가수' 엘자는 그를 데리고 로마로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커피 대사'로서 활동을 했던 가린샤는 엘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게 됐다. 하지만 가린샤는 브라질로 귀국한 이후 엘자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둘 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끝이났다. 1983년 가린샤는 술에 취한 채 거리에 누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펠레는 "가린샤 없이는 세 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룰 순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상대 수비를 피해 경기장에서 날아다니는 듯한 드리블을 보여줬던 가린샤의 또 다른 별명은 '작은 새'. 자신의 드리블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일생을 보낸 가린샤의 묘비석에는 "국민의 기쁨이던 한 사람이 여기 편안히 잠들다"라는 구절이 있다.
***냉정한 '마타도르' 마리오 켐페스**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 줬던 주인공은 마리오 켐페스다. 켐페스는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1978년 월드컵에서 6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 가운데 유일한 '해외파'였던 켐페스는 네덜란드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사실상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확정짓는 골을 터뜨렸다. 아르헨티나는 연장전에서 켐페스의 골에 이어 베르토니의 추가골까지 기록하며 3대1로 승리했다.
연장전에서 터져나온 켐페스의 골은 그가 왜 '마타도르'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잘 설명해 준다. 골 문 앞에서 '킬러'와 같은 냉정함을 갖고 있던 켐페스는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슛을 시도해 골을 만들었다. 펠레가 넣었던 마법 같은 골은 아니었지만 켐페스의 골은 촌철살인의 동물적 골 감각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마타도르는 투우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레타'로 불리는 빨간색 수건을 흔들며 성난 소와 대결을 펼치는 주인공이다. 축구선수로서 켐페스의 최대 강점은 마치 마타도르가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 소의 등에 칼을 꽂고, 결국 소를 쓰러뜨리는 것처럼 한 번 잡은 득점 기회를 좀처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켐페스가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메노티 감독의 '공격 축구'를 완성해 줬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켐페스는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루이스 세자르 메노티 감독에겐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클럽팀들은 모두 수비 지향적인 축구를 했다. 이 때문에 메노티 감독의 공격축구는 자국에서 크게 환영 받지 못했다. 줄담배를 피우며 벤치를 지켰던 메노티 감독은 켐페스의 골이 터질 때마다 기쁨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격 축구를 해야 아르헨티나 축구가 산다"는 주장을 여러 번 했지만 아르헨티나 축구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던 메노티 감독은 켐페스의 '킬러 본능'으로 일약 세계 최고의 명장 대열에 합류했다.
월드컵의 영웅 켐페스는 80년 디 스테파노가 지휘봉을 잡고 있던 스페인의 발렌시아를 '컵 위너스 컵'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듬해에 아르헨티나의 리버플레이트 팀으로 금의환양했다. 절제된 생활과 꾸준한 훈련으로 자신을 다그쳤던 켐페스였지만 나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켐페스는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줬고, 그 뒤 급격한 하락세를 걸었다. 켐페스는 다시 발렌시아로 돌아간 뒤 오스트리아에서 자신의 축구인생을 쓸쓸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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