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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의 위대한 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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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의 위대한 별 지다

[특집] 신상옥 감독, 11일 밤 지병 간질환으로 타계

한국영화계의 전설적 거장인 신상옥 감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상옥 감독은 지병인 간질환으로 11일 밤 11시 39분에 서울대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0세. 영화계는 신상옥 감독의 장례를 위해 원로배우 신영균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긴급 구성해 5일장을 치를 예정이다. 발인은 15일. 장지는 미정이다.
1926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1945년 일본 도쿄미술전문학교를 나와 영화계에 입문한 뒤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52년 <악야, 惡夜>로 데뷔한 신상옥 감독은 1966년 당시 한국 최대의 영화사였던 '신필름' 설립을 전후해 국내 영화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작자이자 감독, 배급업자였다. 한국영화의 현대화는 신상옥과 '신필름'에서부터 비롯됐다는 말은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니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강대진 감독 등과 함께 한국영화계는 르네상스기를 꽃피웠다. 작금의 한국영화계를 가리켜 제2의 르네상스기라고 부르는 것은 신상옥 시대의 60년대를 염두에 둔 말이다. 신상옥 감독은 한마디로 60년대 한국 영화계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서울대 병원에 마련된 신상옥 감독 빈소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신상옥 감독은 그러나 부인이자 1950~60년대 은막의 최고 스타였던 최은희 씨가 1978년 납북된 후 잇달아 본인도 납북돼 86년 다시 탈북한 후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약 10년간 북한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등 영욕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납북과 탈북이 이어지면서 그의 찬란한 창작욕은 거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0년대 후반, 망명자처럼 살았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한 신상옥 감독은 부인 최은희 씨와 함께 안양 영화학교를 운영하는 등 다시 한번 재기의 의욕을 불태웠으나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망했다. 신상옥 감독은 2년 전부터 간이식 수술을 받은 후 건강에 다소 차도를 보이긴 했으나 이미 외부 생활이 어려워 대체로 자택에 칩거해왔으며 주변에서는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어느 정도 그의 죽음을 준비해온 상태였다. . 영화계 원로, 현직 모두 숙연한 분위기 신상옥 감독의 죽음을 가장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역시 김수용 감독 등 생존해 있는 그의 동년배 감독들과 영화인들. 그러나 신상옥 이후 세대인 현재의 영화계 전체 역시 한 '거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대부분 매우 숙연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현재 서울대 빈소에 마련된 그의 영안실에는 12일 현재 영화인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중견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는 "신상옥 감독의 등장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의 개성을 지켜간 감독의 탄생을 의미했다"며 "신 감독 같은 이는 우리 영화사에서 여전히 전무후무한, 거의 유일한 인물에 가깝다"고 평했다. 김 씨의 평가대로 신상옥 감독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같은 멜로드라마에서부터 '천년호'(1969)와 같은 공포영화, '연산군'(1961)같은 사극, '로맨스 빠빠'(1960)와 같은 코미디, '성춘향'(1961)과 같은 고전물, '상록수'(1961)와 같은 문예물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종횡무진의 활동을 펼쳤다. 신 감독의 이 같은 활약으로 한국영화계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섭렵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김영진 씨 등 영화평론가들은 신 감독의 타계를 '한국영화사의 한 장이 완전히 넘어가는, 한 시대의 종언과 같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 자신을 연출할 줄 알았던 영화감독 신상옥 그와 동시대를 살며 협력과 경쟁의 관계를 오갔던 김수용 감독은 최근 발간한 자서전 「나의 사랑 시네마」의 첫 장 '신상옥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그와의 인연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상옥의 인물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대목. 1960년 2월 중순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노벨다방'이라는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난 김수용 감독은 신상옥 감독의 카리스마스에 다소 거부감을 느꼈다고 썼다. 특히 김수용 감독이 가지고 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시나리오를 신상옥 감독 본인이 메가폰을 잡아 연출했을 때도 '그의 마력에 이끌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은 이렇게 덧붙였다. "(…) 오히려 그가 퇴근할 때 지프 앞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집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손에 책을 들고 거기 열중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고, 집에서 신발 벗기가 귀찮아 발길질을 하다가 구두 한짝이 현관 안으로 날아가도 멋있어 보였고, 이발소에서 기름 발라 손질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헝클며 나와도 품위 있어 보였다. 더구나 현장에서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며 연기지도를 할 때 깨끗이 줄세운 바지를 입은 채 거침없이 시궁창에서 무릎을 꿇거나 반들거리는 구두를 신고 개울물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작품을 위해 전력투구하여 연출하는 사람은 있어도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상옥은 현장에서 자신을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납북과 탈북으로 인한 영욕의 세월 겪어 신상옥 감독은 그러나 납북 이후 (이 납치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그 전후 사정이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특히 그가 다시 탈북을 감행, 미국으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자금을 갖고 나온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북한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는 동안 '탈출기'와 '소금' 등 7편의 작품을 만들며 김정일 위원장 정권에 적극 협력했으며 그 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는 당시의 북한 생활을 의도적으로 청산하려는 듯 KAL기 폭파사건을 그린 '마유미'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그린 '증발' 등 우파 보수주의적 영화를 잇달아 발표해 영화계 내에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분단 현실이 위대한 작가로 남을 수 있었던 인물의 삶에 영욕의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신상옥 감독에 대한 평가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높은 것도 다소 아이러니한 점이다. 신상옥 감독이 1994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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