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영화감독 그레이스 리의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가 미국에서 꾸준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되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들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담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로스앤젤레스 개봉에 이어 미국 내 여러 도시로 확대 상영되고 있는 이 영화의 작지만 강한 힘을 조명한다. - 편집자 |
최근 하인스 워드의 방한으로 여러 언론들이 '이제는 다인종 시대'라는 헤드라인 아래 다양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주로 국내 혼혈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와 그들을 한국인으로 포용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혼혈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는 '이산(離散)'이라는 큰 주제 아래 최근의 이슈들과 맞닿아 있는 영화다. 한국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 성장 환경의 차이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경쾌하고 진지한 자기 정체성 찾기 이 영화는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들 가운데 '그레이스 리'라는 이름이 무척 흔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미주리 주의 작은 도시에서 성장한 그레이스 리 감독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대도시 LA로 이사온 뒤 세상에는 수많은 '그레이스 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같은 이름의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그레이스 리'에 대해서 "지적이고, 영리하며, 착하고, 조용한" 캐릭터였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레이스 리는 인터넷 사이트(www.gracelee.net)를 열고 미 전역의 그레이스 리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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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리(왼쪽),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 포스터(오른쪽) ⓒwww.gracelee.net |
영화는 웹사이트를 통해 연락이 닿은 수많은 그레이스 리와의 만남을 담고 있다. 그 가운데는 젊고 유능한 TV 뉴스 기자, <반지의 제왕>의 골룸을 좋아하며 예술적 소양을 갖춘 14세 소녀, 한국에서 입양된 미혼모이자 필리핀계 친구와 함께 대안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는 40대 중반의 여성,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한 20대 중반의 여성 등 다채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그 가운데 인상적인 인물은 디트로이트에서 평생 흑인 인권 운동에 헌신한 88세의 액티비스트. '그레이스 리 보그스'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지역 재건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 중국계 여성은 영화가 개봉된 뒤 지역 사회에서 꽤 화제가 되었다. 그레이스 리 감독은 이 이름을 가진 여성들의 통계를 통해 일종의 평균치를 추산하기도 한다. 평균 나이는 약 25세이고, 미국인이며, 부모는 한국계 이민자이며, 미혼이고, 3.5년 정도 피아노 교육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에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공부도 잘 한다는 평판을 들어 왔다. 감독은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일상 생활 속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단어라는 데 착안, 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이 이름을 선호했는지를 추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미국 내 아시아인 커뮤니티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기독교 전통, 즉 '은총(grace)'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의 영향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 '그레이스 리'의 부모 세대들이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이상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딸이 그레이스 켈리처럼 아름답고 정숙하며 신분 상승에 성공한 미국인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 서울의 풍경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레이스 리는 몇 차례의 서울 방문을 통해 결혼식장이나 과자, 의상실 등에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서울에서 레즈비언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 교포 출신의 '그레이스 리'라는 인물을 만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영화는 미국 내 이민자들이 올바르다고 믿어 온 신념, 그리고 그 가치가 반영된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유년 시절부터 체화해 온 일정한 규율과 자기 정체성을 파헤치고 있다. 감독이 직접 진행한 내레이션과 평범하지만 흥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레이스 리'들, 애니메이션과 모션 그래픽이 더해진 이 경쾌한 다큐멘터리는 68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충무로 영화산업, 좀더 포용력을 가져야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는 지난해 초 샌프란시스코 국제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다. 그리고 사우스 바이 사우스 영화제와 LA 영화제 등 미국 내 다양한 영화제를 통해 꾸준히 소개됐으며, 부산영화제를 거쳐 12월 뉴욕 필름 포럼에서 개봉됐다. 미국 내 다문화, 다인종 비영리 미디어 예술 문화 조직인 '여성이 영화를 만든다(Women Make Movies)'가 배급을 맡았다. 주로 독립 여성 감독들의 작품을 배급해 온 이 단체는 작은 영화제와 주요 도시의 시네마테크에 이 작품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그레이스 리 감독은 공식 사이트와 이메일을 기반으로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의 상영 소식을 전했고, 주로 아시안 아메리칸의 블로그와 웹사이트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이 영화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풀뿌리' 영화 운동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배급해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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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아침 프로그램인 <굿 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한 '그레이스 리' ⓒwww.gracelee.net |
뉴욕 필름 포럼 상영을 기점으로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는 더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었다. 뉴욕 타임스, 빌리지 보이스, LA 타임스 등 미국 내 주요 언론들의 호의적인 리뷰가 잇달았다. 버라이어티는 "아이덴티티와 문화적 유산에 대한 재미있고 복합적인 성찰"이라 칭했고, LA 타임스는 "유머와 통찰력을 갖춘 흥미진진한 초상"이라고 호평했다. 시애틀과 디트로이트 등 미국 대학 영화제에서는 만원 사례를 이뤘고, 아시아계 커뮤니티와 소수 민족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6일까지는 LA의 한 예술영화관에서 개봉되었으며, 이에 맞춰 미국의 대표적인 아침 프로그램인 <굿 모닝 아메리카>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4월에 시카고, 5월에 포틀랜드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그레이스 리 감독의 지난해 부산영화제 방문 이후 국내 몇몇 예술영화 배급사들에 이 영화의 극장 개봉을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 선뜻 이 영화를 국내 배급하겠다고 나선 영화사는 없는 상태다. 재미교포 여성 독립영화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한 소박한 일기 같은 이 작품의 국내 흥행 가능성이 그리 밝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재외 교포 감독들의 작품에 대해 충무로는 아직 폐쇄적인 것도 사실이다. 꾸준히 국내 영화계에서 활동 기회를 타진해 온 그레이스 리 감독에게는 그런 국내 영화산업의 현실이 장벽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는 2004년 부산영화제 PPP에서 <버터냄새>라는 프로젝트를 제출해 상을 받은 바 있다. <사이드웨이><그레이 아나토미>의 산드라 오가 캐스팅되었던 이 프로젝트는, 국내 한 영화사가 사전 작업을 진행했다가 크랭크인 직전에 일방적으로 제작 계획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당시 그레이스 리 감독은 충무로 영화사의 즉흥적인 제작 시스템에 당황하고 낙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히 IHQ에서 좀비를 소재로 한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국내에서도 이 흥미로운 영화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가 개봉되기를, 그리고 그가 한국 영화산업 내에서 좀더 안정적인 발판을 토대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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