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의 장률 감독이 한국에 왔다. <망종>은 중국에서 김치를 팔아가며 어렵게 살아가는 조선족 여인 최순희의 얘기를 그린다. 영화 내내 그녀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펼쳐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장률 감독의 시선은 꽤나 관조적이다. 장률 감독 역시 조선족 출신으로서 재중국 동포3세인 만큼 영화 속 여주인공이 겪는 고통이 이미 자신에게 깊이 내재화돼 있는 것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망종>은 국내에서 이제야 개봉하지만, 2004년에 이미 촬영과 후반작업을 끝내고 2005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ACID상을,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에서는 대상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부산영화제에서도 뉴 커런츠 상을 수상했고 지난 2월 프랑스 브줄 아시아영화제에서도 대상을 받는 등 전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크게 주목 받은 수작이다. '망종(芒種)'은 '보리를 베어내고 볍씨를 뿌리는 시기'를 뜻하는 말이다. <망종>은 마치 그렇게, 볍씨를 뿌리듯 영화를 오락이 아닌 예술로 생각하는 장률 감독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 |
|
장률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장률 감독이 영화감독이 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삶의 원칙을 지키려는 고집스런 성격 탓이 더 컸다. 연변대학교 중문학과 교수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자신에게 시나리오를 청탁했던 영화감독 친구가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는 술김에 한마디 내뱉고 만다. "영화감독은 아무나 하면 되겠지. 그렇다면 내가 영화를 찍겠다." 장률 감독은 술김에 한 말이라도 지키는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던 것. 그러나 엉겁결에 영화감독이 된 사람답지 않게 장률 감독은 어렵사리 만든 단편 <11세>가 베니스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됨으로써 데뷔와 동시에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 내는 인물이 됐다. 그 후 아파트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전직 소매치기인 중년 남자의 고요한 일상을 담은 장편 <당시>를 만들었으며 <망종>은 그의 두번째 장편 영화다. 내한 예정일이었던 지난 8일 여권을 분실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해 홍보팀의 애를 태웠던 장률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인 9일 서울에 도착했다. 10일 오후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 듯 피곤한 얼굴로 나타난 장률 감독은 그러나 안경 너머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확고한 예술관과 세계관으로 영화를 만드는 진정한 예술가 장률 감독과의 진지하고 철학적인 대화를 정리한다.
- <망종>을 보고 있으면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느껴진다. 그런가? 사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상황에 따라 생각도 그때그때 많이 바뀐다. 내가 쓴 시나리오와 영화로 만들어진 <망종>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스태프에게조차 시나리오를 주지 않았다. 영화의 대부분은 미리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뽑아낸 것이다.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지켜나가는 고집만 있으면 된다.
- <망종>은 주인공 최순희의 일상을 담담하게 따라가기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 나는 감정을 과장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어떤 관객이 벌떡 일어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내 생활과 저렇게 똑같이 묘사했는지 놀랍다"고. 최하층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중국 내의 조선족이나 한국의 빈민이나, 유럽의 최하층이나 다 똑 같은 거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
|
망종 ⓒ프레시안무비 |
- <망종>은 주인공 최순희가 배신을 당하거나 아들이 죽는 등 큰 사건이 생길 때도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들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관객들이 최순희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팍팍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망종>에서 담아냈다. 그리고 나는 최순희처럼 절망 앞에 무릎꿇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희망을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희망이란 막연한 희망은 아니다. 남자들이 비겁하게 상황을 피해갈 때도 최순희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최순희는 용기 있는 여자다. 용기 없는 사람은 그런 상황을 피해갈 방법을 찾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영화 속 남자들처럼.
- 영화 속 남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망종>에서 당신은 남자의 누드는 보여주는데 여자의 누드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나도 남잔데 여자를 벗기면 좋기는 하겠지.(웃음) 그런데 현장에서 여자를 벗겨야 할 정당성이 안 생겼다. 여자를 벗겨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더라. 그 장면 기억나나? 유부남 김 씨가 벌거벗은 채 멍청하게 서 있는 장면. 남자는 옷을 입혀 놓으면 사람 같은데 벗겨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옷은 남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가면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나는 이 영화에서 고의적으로 남자만 벗겼고, 벗은 남자를 멍청하게 그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여성 관객이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그렇게 써달라.(웃음)
- 남성 감독으로서 하기 쉬운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남자와 여자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여자가 더 용기가 있다. 여자는 절망과 마주설 수 있는 존재다. 최순희는 사랑에 있어서 용감했다. 상대가 유부남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던져 사랑한다. 그러나 상대 남자는 아내에게 최순희의 존재를 들키자 그녀를 '창녀'라고 말해버린다. 분명 그 남자도 최순희를 사랑했을 거다. 그러나 사회적 가면을 쓴 남자는 비겁했던 거지. 경찰서에 잡혀 있는 최순희를 강간하는 경찰관도 그 점에서는 똑같이 비겁하다. 욕망 때문에 여자를 탐하고 힘든 상황에 빠뜨리지만 그에 대해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 후에도 잘들 산다. 세상은 진짜 그렇게 굴러간다. 영화 속 최순희는 결국 쥐약을 김치에 뿌려 복수를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본 관객들은 저런 삶도 있는데 내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절망적인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모든 걸 아름답게 포장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살하는 사람은 있어도 내 영화처럼 절망밖에는 남은 게 없는 사람의 삶을 그린 영화를 보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절망과 마주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망종 ⓒ프레시안무비 |
-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도 한때는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봤다. 영화는 스타를 비롯, 재미를 주는 오락적이고 상업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기본적으로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농담도 하면서 즐겁게 살 수도 있지만, 언제나 농담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나? 진지한 대화도 꼭 필요한 거다. 오락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많지만, 내 영화처럼 단순하고 성실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 <망종>이 훌륭한 예술영화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이 좋아할지는 의문이다. 그런가? 나는 이런 진지한 영화를 찾는 한국 관객들이 앞으로 점점 많아질 거라고 믿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