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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장가에 '미국 풍경'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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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장가에 '미국 풍경'들이 넘쳐난다

[특집]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돈 컴 노킹>까지

2004년 6월 영국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에드워드 호퍼의 대규모 전시회를 마련했다. 영국에서 20여 년 만에 호퍼의 그림을 선보이는 이 전시에서는 영화 상영회도 함께 열렸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 등이 상영됐다. 그리고 토드 헤인즈 감독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자신의 영화에 대해 특별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세이프>, <포이즌>, <파 프롬 헤븐> 등에서 소외된 인물들의 초상을 그렸던 토드 헤인즈는 오래 전부터 에드워드 호퍼의 팬임을 자청했다. 그가 미국인의 일상 생활과 인물들의 정서적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은 많은 부분 호퍼의 그림과 일맥상통했던 것이다. 물론 에드워드 호퍼의 영화적 후계자는 단지 토드 헤인즈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호퍼의 흔적을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에서 발견할 수 있다. . 가장 미국적인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풍경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뉴욕에서 성장한 그는 젊은 시절 유럽을 세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유럽에서 돌아올 때면 미국은 지독히 조악하고 볼품 없어 보인다"고 말하곤 했다. 호퍼의 초기 작품들은 대개 유럽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퍼는 당시 유럽에서 싹트고 있던 모더니즘 운동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퍼는 유럽의 현란함과는 정반대인 미국의 소박하고 황량한 풍경들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소위 '미국 풍경화파(American Scene Painting)'라 불리는 현대 미술사조의 대표주자 역시 에드워드 호퍼다. 인적 드문 거리와 고요한 도시의 정경, 드넓은 초원에 외따로 떨어져 놓인 집 등은 호퍼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그는 일직선과 수평선의 모티프를 즐겨 사용했으며, 길이나 철길 등을 활용해 화폭을 분할하곤 했다. 호퍼가 그린 집과 도시는 20세기 초반 전형적인 미국의 일상 건축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인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공간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호퍼의 그림들은 1940년대 이후 발표한 작품들에서 더욱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이때부터 호퍼는 자신의 작품에 인물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한데 그 인물들은 대부분 홀로 등장하고, 주변과 소통하지 않으며, 생각에 잠긴 채 침묵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유소 Gas>(1940) <4차선 도로 Four Lane Road>(1956) <일요일 Sunday> 등은 바로 그런 호퍼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또한 호퍼는 호텔과 식당, 극장과 카페, 주택과 사무실 같은 일상적인 공간들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여성과 태양 광선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들에서도 같은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아침 태양 Morning Sun>(1952) <이층의 햇빛 Second Story Sunlight>(1960) <카페테리아의 햇빛 Sunlight in a Cafeteria>(1958) <햇빛 받는 여인 Woman in the Sun>(1961) 등에는 호퍼가 공간을 분할하고 빛을 활용하는 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은 인물보다 배경의 비중이 더욱 크며, 종종 창문을 기준으로 실내와 실외가 구분되어 있다. 창문 바깥의 자연적인 풍경과 창문 안쪽의 인위적인 공간은 대립되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호퍼의 그림 스타일이 매우 뚜렷한 심리적인 효과를 자아낸다는 사실. 호퍼의 공간은 현대인과 친밀하지만 매우 낯설게 느껴지며, 덕분에 그림 속 인물들의 고독감과 소외감은 한층 강조된다. . <브로크백 마운틴>, 고독한 인물들의 정적인 풍경화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은 모두 가장 미국적인 배경에서 출발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은 험준한 산 속에서 양떼를 치는 카우보이이며, <돈 컴 노킹>의 한물 간 스타 하워드 스펜스는 주로 서부극에서 맹활약한 인물이다. 이 두 영화가 장르로서의 웨스턴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는 웨스턴이야말로 미국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 모두 개인을 통해 미국적인 삶의 양식과 미국 사회의 흥망성쇠를 미시적인 차원에서 성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웨스턴을 모티프로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장르로서의 웨스턴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영화가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현대의 미국을 통찰하는 방식이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인물들의 고립감을 강조하며 시작된다. 트럭에서 내려 뒷모습을 보이며 황폐한 마을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에니스(히스 레저)의 첫 모습에서 호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간이 사무실 앞에 서서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인 에니스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호퍼적인 인물에 다름 아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에니스와 잭(제이크 질렌할)의 다음 컷도 마찬가지다. 텅 빈 거리에서 앞뒤로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둘을 익스트림 롱 쇼트로 담아낸 장면은, 호퍼의 <일요일 이른 아침 Early Sunday Morning>(1930)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후반부에서는 또다른 '호퍼 모멘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작은 마을과 검소한 주택들은 대부분 호퍼의 그림에 나올 법한 것들이다. 특히 에니스가 잭의 고향 집에 찾아가는 장면. 잭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방을 둘러보는 에니스는 작은 창문을 열고 잠시 바깥을 내다본다. 창문 너머의 풍경과 창문 안쪽 실내 풍경의 대비는 앞서 말한 대로 호퍼가 즐겨 그렸던 것들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컷은 더욱 그렇다. 에니스가 "맹세할게…"라는 저 유명한 마지막 대사를 한 뒤 옷장 문을 닫고 나면, 카메라는 그대로 정지한 채 매우 이상한 구도의 프레임을 한참 동안 비춰 보인다. 화면은 둘로 분할돼 있는데, 왼쪽에는 옷장의 닫힌 문이, 오른쪽에는 창문 바깥의 풍경이 비친다. 그 창문 바깥에는 스산하게 바람이 부는 가운데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흔들리고 있다. 이렇듯 집 내부의 정적인 풍경과 그 바깥의 동적인 움직임의 대비는 호퍼 작품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호퍼의 <바닷가의 방 Rooms by the Sea>(1951)은 바로 이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컷과 절묘하게 조응한다. . <돈 컴 노킹>, 낡은 도시와 방랑자의 이미지 <돈 컴 노킹>은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호퍼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파리 텍사스> 이후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가 다시 만난 이 영화는 길과 방랑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촬영장을 탈출한 하워드 스펜스는 어머니가 계시는 네바다주 엘코를 찾아간다. 주인공이 미국 중부를 횡단하며 방랑하는 만큼, 호퍼의 그림처럼 수많은 모텔과 호텔, 카페와 주유소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워드가 수십년 만에 방문한 고향 엘코는 카지노를 주된 사업으로 한 쇠락한 마을이다. 하워드의 눈에 비치는 이 도시의 뷰(view)는 에드워드 호퍼의 <엘 팔라치오 El Palacio>(1946)처럼 낡고 빛이 바래 있다.
미국의 작은 도시를 횡단하는 이 영화의 '호퍼 모멘트'는 하워드의 세 번째 방문지인 몬태나주 뷰트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워드가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는 이 도시는 한때 광산업으로 번창했던 큰 도시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주택과 빌딩은 넓은 길 위에 도열해 있지만, 그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낮은 채도의 색감과 음울한 분위기는 하워드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으나 평생 누구와도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했던 그의 황량한 내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는 촬영감독 프란츠 러스티그와 함께 뷰트를 지극히 호퍼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하이라이트 조명이 강조돼 있는 밤 풍경은 <약국 Drugstore>(1927)과 <밤을 새는 사람들 Nighthawks>에서 봤던 그대로다. 아들과 대판 싸운 뒤 쓸쓸하게 걸어가는 하워드의 뒷모습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돈 컴 노킹>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마도 하워드가 옛 애인 도린(제시카 랭)과 뷰트 시내에서 말다툼하는 대목일 것이다. 도린은 무심한 하워드에게 마음 속의 원망을 털어놓은 뒤 내리막길을 걸어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달아나버린다. 그리고 그 뒤를 쫓던 하워드는 미처 도린을 잡지 못한 채 전봇대에 기대 고개를 깊이 숙인다. 이 도시의 낡은 무드는 호퍼의 <원형 극장 The Circle Theater>와 상당히 닮았다. 그리고 인물들의 고독감을 강조하는 이 앵글과 고개 숙인 하워드의 모습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브로크백 마운틴>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봤던 에니스의 모습과 대칭을 이룬다.
. 미국 영화에 되살아난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야말로 미국인의 일상과 미국적인 풍경을 가장 잘 묘사하는 화가였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이 호퍼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좀더 주의를 기울이면 미국 영화사에서 호퍼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도 그중 하나였다. <싸이코>의 주무대인 미치광이의 저택은 호퍼의 <기찻길 옆 집 House by the Railroad>(1925)을 참조했으며, <마니>는 <밤의 사무실 Office at Night>(1940)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목록에는 데이비드 린치도 포함돼 있다. 린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로 잭슨 폴록과 프랜스시 베이컨,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라고 즐겨 말했다. <블루 벨벳><트윈 픽스><스트레이트 스토리> 등 미국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린치는 호퍼의 그림이 간직한 팽팽한 긴장감과 스산한 정경을 재연한 바 있다. 물론 앞으로도 미국 영화는 호퍼의 자장 아래 놓여 있을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돈 컴 노킹>은 그 중간 기착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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