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화계에 사극이 대세다. <왕의 남자>가 개봉 9주차를 지나면서 한국영화 흥행 역사를 새로 써나가면서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인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록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주말 또 한 편의 사극 <음란서생>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바야흐로 극장가에 사극 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두 편의 사극영화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은 기존의 사극영화와 다른 컨셉으로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당대 과거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왕의 남자>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연산군 시대. 당시의 조정은 음모와 질투, 상대방에 대한 비방이 난무하고 주인공 남사당패는 부정부패에 찌든 양반들을 잔뜩 희롱하는 굿판으로 서민들의 울분을 풀어 준다. 사람들이 <왕의 남자>에 열광하는 건 바로 역사적 리얼리티. 영화는 관객들에게 시대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음란서생>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 중기라는 모호한 시대적 배경을 내세워 당대 최고의 음란 소설 작가 김윤서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음란서생>은 궁중의상과 소품을 비롯한 화려한 비주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한편으로 실제로는 '작가=작품=독자'라는 상관 관계를 현대적인 상황과 언어를 동원해 긴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 <반칙왕>, <정사>,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 등의 시나리오를 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김대우 감독은 자신이 직접 쓴 이번 영화를 통해 지금 시대의 작가적 고민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흥미롭게 묘사해 낸다. 그 대구와 리듬이야말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는 요소다.
. 정통에서 벗어나 오히려 정통을 지향하다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은 정통사극과는 달리 현대적인 언어와 말투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통사극에서 흔히 들어왔던 "하겠사옵니다" 같은 말투 대신 지금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와 말투를 약간씩만 변형해 활용함으로써 젊은 층 관객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사극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음란서생>에서 흥미로운 요소는 인터넷이 판을 치는 요즘 세태의 풍속도를 조선 시대의 상황으로 끌고 들어가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댓글이나 폐인, 동영상 같은 인터넷 시대의 용어들을 그대로 활용하는가 하면, 열혈 독자들의 여론몰이와 룸살롱 같은 화류계 문화, 몰래 카메라 같은 현대 미디어의 요소들을 살짝 비틀어 조선시대로 옮겨놓음으로써 역설의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이 같은 묘사야말로 <음란서생>을 단순한 사극의 범주에 가두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 모두 조선이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현대의 정서와 문화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 역사적 상황과 작가의 상상이 맞아떨어지면서 영화는 큰 시너지 효과를 갖게 된다.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은 이처럼 과거를 통해 현재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진영을 구축하게 된다. <왕의 남자>나 <음란서생>처럼 과거를 배경으로 한 현대적인 사극이 박스오피스를 휩쓸면서 사극 열풍이 이어지고 있는 현상은 한국영화계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영화계가 역사 고증에 대한 강박증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반증임과 동시에 한국영화의 소재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으며 작가의 상상력이 또한 훨씬 풍부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사극 붐을 놓고 평단에서 한결같이 긍정적인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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