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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과 <브로크백 마운틴>, 우리는 진정 이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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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과 <브로크백 마운틴>, 우리는 진정 이기고 있는가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웃음이 복을 가져 온다지만 도통 웃을 일이 없는 세상이다. 안보고 살 수 없으니 억지로라도 신문을 펼치고 나면 온통 다툼과 갈등 뿐이어서 휘리릭 다시 신문을 접고 만다. 생각해 보면 요즘 우리에게 유일한 웃음을 주는 일이라곤 스포츠밖에 없다. 한국계 혼혈아 하인즈 워드가 슈퍼볼에서 MVP상을 받았다거나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출전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데뷔골을 넣었다거나 등등. 이런 얘기는 기다렸다는 듯 1면의 사이드 톱을 장식한다. 스포츠가 일상의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기뻐서 축하할 일이 이것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을 억지로 웃게 하기 위해 프로야구단을 출범시킨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 된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가.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아무래도 회의적인 생각이 불쑥불쑥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뮌헨(左)과 브로크백 마운틴(右) ⓒ프레시안무비
영화에 사람들이 지금껏 열광하는 이유는, 그나마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같은 믿음, 그러니까 세상 한 구석에서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응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들 목록에는 예컨대 3월에 있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해 국내에서도 일제히 개봉될 <뮌헨>이나 <브로크백 마운틴> 그리고 <굿 나잇, 굿 럭>같은 작품들이 꼽힌다. 씁쓸한 미소를 띄우게 하는 건 그런 영화 목록에 한국영화들은 그리 많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글쎄. <왕의 남자> 정도 하나가 있을까. 지금 국내에서 간판을 걸고 있거나 곧 간판을 내걸 <투사부일체>니, <선데이서울>이니, <백만장자의 첫사랑>이니 하는 작품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엄동설한에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투쟁이 정작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는 사람들에게 왜 전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지, 도무지 그 괴리감의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염증이 난다.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나이먹은 '노땅'이든 혈기방장한 새파란 젊은이든 세상을 진정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정말 '실용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맹동주의와 기회주의를 모두 타파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실용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가두로 나가거나 혹은 정부의 편에 서거나 오로지 둘 중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우파 파시즘도 극악하지만 좌파 파시즘도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그건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르쳐 준다. 그건 몇차례에 걸쳐 국공합작을 실행했던 마오쩌뚱에게서, 절대적으로 타도의 대상이었던 프랑스와 일시적이나마 잡았던 호치민에게서, 맨셰비키 활동을 한 우파 기회주의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결국 용서했지만 좌파 모험주의자였던 스탈린은 끝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레닌에게서, 배울 일이다. 먼 나라, 먼 옛날의 전설적 혁명이야기일 뿐이라고?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가 않다.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는 건 스티븐 스필버그가 내놓은 걸작 <뮌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스필버그는 9.11로 야기된 우리세대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70년대초 뮌헨 사태로 빚어진 앞선 세대의 정신적 외상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 준다. 시네마베리떼 스타일의 다큐멘터리와 히치콕 스타일의 서스펜스 스릴러를 오가면서도 그가 주력했던 건 테러가 벌어진 뮌헨 공항의 공간과 붕괴되기 전인 쌍둥이 무역센터의 배경을 병치시키는 것이었다. 골다메이어가 주도했던 '신의 복수' 작전의 주구였던 주인공 모사드 요원 에브너(에릭 바나)는 결국 뉴욕에서 망명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고 그런 그를 상관(제프리 러쉬)이 만나러 온다. 상관은 그에게 이스라엘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에브너는 자신이 암살한 인물들이 정말로 뮌헨 테러와 연관이 있는 자들이냐고 캐묻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 전쟁의 끝에는 결코 평화가 오지 않는다"고. 그런 두 사람의 대화 뒤 저 멀리 흐릿하게 쌍둥이 빌딩이 배경으로 걸린다. 지금 무역센터 빌딩은 붕괴했지만, 그래서 미국 정부는 또 다시 '신의 복수'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평화는 결코 찾아오지 않고 있다. 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게 됐는지, 스필버그는 70년대로 돌아가 그 해답을 찾자고 얘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뮌헨>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지금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70년대로 돌아가 찾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이안 감독은 와이오밍주의 대규모 방목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두 카우보이의 감동적인 동성애적 사랑을 펼치는 한편으로 정작 중요한 것은 두 주인공을 억압했던 70년대의 사회적 기제가 지금도 버젓이 우리에게도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고 우리의 마음 속은 여전히 외롭고 황량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속 두 사람이 20년을 견디며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안은 얘기한다. 삶은 비극적이지만 우리는 결코 그 비극을 비극 그대로 놔둬서는 안된다는 것에 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동이 있다. 우리 모두는 지난 20여년간을 이어져 오는 구호와 투쟁문구 속에 살았다. 그동안 일정한 정치적 승리가 주어지긴 했으나 그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돼 왔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술이 해야 할, 영화가 해야 할 역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하지만 우리의 예술은, 우리의 영화는 그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사회는 과연 한발자국씩이나마 전진하고 있는가. 이건 또 다른 기회주의인가 자성의 고백인가. 올바른 가치판단이 진정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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