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 카이거의 <무극>은 첫 장면부터 심하다. 노예가 되려는 쿤룬(장동건)에게 황장군(사나다 히로유키)이 중국식 특유의 과장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묻는다. 너는 왜 노예가 되려 하느냐? 쿤룬은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고 약간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고기를 실컷 먹으려구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은 쿤룬이 엄청난 들소떼의 공격을 피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장면이다. 관객들은 이때부터 아예 이 영화에 대해 웃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는 슬슬 비아냥거릴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빛보다 빠른 경공술을 가진 소유자가 고기를 실컷 먹기 위해 노예가 되겠다고? 이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더더군다나 젖먹던 힘까지를 다해 앞서 달려가는 쿤룬의 모습과 들소떼의 모습은, 이거 CG요 하는 티를 아주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무극>은 아마도 최근에 나온 영화들 가운데 최악의 CG 기술력을 선보인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건 단순한 기술력의 부족인가, 아니면 제작비 운용의 잘못인가, 아니면 근본적인 창작력의 부족인가. 무엇보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첸 카이거라는 중국 거장의 작품에서 잇달아 보여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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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 ⓒ프레시안무비 |
. 첸 카이거, 변했으되 변하지 않았다 <패왕별희>와 <풍월>, <황제의 암살>의 감독 첸 카이거가 이번 영화의 전작 격에 해당하는 <투게더>를 2003년에 발표했을 때 그는 여기저기서 변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투게더>는 한 가난한 남자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자신의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이자, 눈물겨운 신파 부자극이었다. 휴먼 드라마이자 가족 드라마이고 무엇보다 소극이다. <패왕별희>를 떠오리면 첸 카이거는 당연히 '변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 했다. 하지만 <투게더>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첸 카이거는 분명 그 전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투게더> 전까지 첸 카이거는 늘 화려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자긍심을 선보여 왔다. 중국 제5세대 감독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영화가 자꾸 커졌던 건 그때문이다. 하지만 <투게더>를 통해 그가 변화를 시도한 건 자신 스스로가 과도한 형식과 스타일에 대한 강박증을 덜어내려 했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자잘한 인간사의 일상, 그 내밀한 호흡을 보여주는 쪽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첸 카이거가 '변했으되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내면만큼은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 주제의식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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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풍월, (右)황제의 암살 ⓒ프레시안무비 |
첸 카이거는 끊임없이 '전체와 개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그가 얘기하는 영화적 담론은 늘 거대하다. 사회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담아 낸다. <투게더>에서는 시골사람인 아버지가 북경 고층빌딩의 유리창 닦기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는 깎아지른 듯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고층 유리건물과 그 가운데쯤에서 무섬증이 인 표정으로 옥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유리창을 닦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앙각으로 잡는다. 무서운 속도로 자본주의화의 길에 접어 든 중국사회와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국 대다수 프롤레타리아, 인민대중들의 모습이 대비되는 장면이다. 시골 아버지는 고층건물 유리창을 닦다가 자칫 아래로 추락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센 자본주의의 물결에 합류한 중국사회도 마치 그렇게 보인다. 추락할지도 모른다고 첸 카이거는 얘기한다. 그랬던 첸 카이거가 이번 <무극>에서는 다시 과거의 스타일 강박증을 나타내고 있다. <투게더>로 새롭게 변화 아닌 변화를 꿈꿨던, 그래서 소위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 :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원칙으로 만변하는 변화에 대응한다)을 꿈꿨던 첸 카이거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그랬을까. 첸 카이거는 왜 과거로 돌아갔으며, 왜 <무극>같은 사극판타지의 세계를 그리려 했을까. 그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사극 판타지로 현실의 변화를 꿈꾼다 첸 카이거의 이번 <무극>은 장이모우가 대하 서사극 <영웅>과 <연인>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 모두 5세대 감독이다. 5세대는 중국사회의 들끓는 변화의 시작을 경험했던 세대들이다. 5세대 감독들은, 영화를 통해 중국사회의 변화를, 공산당 일당 체제의 변화를, 풍요로운 자본이 넘치면서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꿈꿔 왔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장이모우와 함께 첸 카이거 역시 톡톡한 좌절을 맛봤다. 영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의 설계도, 영화 그 자체의 성공도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실패한 지식인, 좌절한 지식인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이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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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패왕별희, (右)투게더 ⓒ프레시안무비 |
아마도 그럴 때 첸 카이거 같은 작가가 도피할 수 있는 곳,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은 <무극>의 배경이 되는 '설국(雪國)'처럼 머나 먼 역사의, 환상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장 이모우가 <영웅>에서, 기원 전 역사인 진시황의 통일 과정과 그때 있었던 무사들의 사연을 통해 현재의 중국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정치적 타협을 했던 것처럼, 아주 먼 과거의 얘기를 도입하면 역설적으로 현실의 얘기를 다시 한번 잘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장이모우처럼 체제순응적으로 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물론 선택의 문제이긴 하더라도. 그래서 첸 카이거도 장이모우처럼 사극 판타지의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결국엔 관객들의 대대적인 비웃음을 사는 <무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첸 카이거는 조잡한 CG기술을 동원해 운명의 여신이 쿤룬에게 하늘로부터 다가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부상당한 쿤룬이 칭청공주(장백지)를 안고 역사를 거꾸로 돌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건 너의 의지에 달려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라." 관객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비웃는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첸 카이거가 <무극>을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장면에 집중돼 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서까지라도, 그 말도 안되는 환상을 통해서라도 그는 지금의 중국 역사를 되돌리거나 뒤바꾸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운명의 여신 말마따나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운명의 여신의 마지막 대사처럼 중국인민들 모두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이 지식인의 진정성이 대중들에게 거의 전혀 소구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패왕별희>에서 <투게더>에 이르는, 첸 카이거의 좌절의 기간을 잘 알지 못하는 신세대 관객들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캐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지금의 영화관객들은 그런 신세대들 천지다. 그러니 결국 첸 카이거는 섣불리 신세대 관객들에게 손을 내민 꼴만 되고 말았다. 마음이 아프고 안됐지만 첸 카이거의 이번 실패는 그래서, 처음부터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운명의 여신의 말처럼 첸 카이거부터 먼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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