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관세화 유예 협상' 과정에서의 국가 간 '이면합의'를 공개하라"며 농민단체들이 낸 소송에서 법원이 "국익을 고려해 공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해당 정보를 Ⅲ급 비밀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도 아울러 내린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주목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김창석)는 지난 10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정부가 쌀 관세화 유예 협상 과정에서 미국 등 9개국과 맺은 '이면합의서'를 공개하라"며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개별 국가와의 양자합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공표될 경우 이후의 통상교섭에 있어 다른 국가들의 교섭정보로서 활용될 수 있다"며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외통부의 공개거부 이유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기업의 경영과 영업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공표돼 투명하게 됨으로써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한편, 일정한 경영과 영업상의 비밀이 보호됨으로써 기업의 정당한 이익이 지켜질 수 있다"며 "국가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통상에 관한 합의 등이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정당한 이익이 보다 잘 지켜질 수 있다"고 농민단체의 청구를 기각한 이유를 설명했다.
***법원 "이면합의 공개가 국가안전 보장에 손해를 끼친다 볼 수 없어"**
하지만 재판부는 외통부가 해당 내용을 'Ⅲ급 비밀'로 분류한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잘못"이라는 해석도 동시에 내렸던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이 사건의 농민단체 측 변론을 맡은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재판부는 "보안업무규정 제4조는 '누설되는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을 Ⅲ급 비밀로 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 사건 정보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 당초부터 명백하게 잘못된 분류라 할 것이어서 이 사건 정보에 관한 행정청의 위와 같은 Ⅲ급 비밀로서의 분류의 효력은 인정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안전보장의 개념은 국가의 존립, 헌법의 기본질서 유지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결국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헌법과 법률의 기능,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의 유지 등을 의미한다"며 "쌀 관세화 유예연장을 위한 개별국가와의 협상에 있어서의 합의 내용을 담은 이 사건 정보가 이러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법원은 외통부가 정보공개법 제9조 1항 2호에 근거해 '국가의 이익'을 이유로 해당 협상 내용에 대해 공개를 거부한 것은 정당하다고 밝히면서도, 같은 조항 1호의 '비밀'이어서 정보공개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협상 내용을 'Ⅲ급 비밀'로 분류한 것 자체가 적법하지 않기 때문에 근거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외교통상부와 농림부 등은 그동안 '이면합의' 공개 요구에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9조 1항을 근거로 "비밀 또는 비공개 사항으로 규정된 정보(1호)"와 "국가안전보장, 국방, 통일, 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2호)"는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었다.
이에 따라 각종 FTA 등 향후 비슷한 통상협정에 대한 정부의 비밀분류 여부가 주목된다. 정부가 그동안 "외교관계에 관한 내용은 'Ⅲ급 비밀'에 해당한다"며 통상협정에 대해 대부분 비밀로 분류하고 공개를 거부했었다.
***송기호 변호사 "정부에서 무조건 비밀로 분류해 갈등 발생"**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는 그동안 외국과의 통상 협정을 대부분 Ⅲ급 비밀로 분류하고서 공개를 무조건 거부해왔다"며 "이와 같은 밀실주의 외교에 의해 국민들의 알 권리가 제한되고, 정작 국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외국과의 통상협상 내용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송 변호사는 "이번 '이면합의' 내용을 국회의원들에게만 비공개로 열람시켜줬다지만, 법률상 '비밀'로 분류돼 비밀엄수 조항 때문에 밖에서는 그 내용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며 "결국 사회적 논의 부족으로 인해 국회 비준시 농민들의 극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또한 "물론 이번 정보공개 소송에서는 '국익'의 이유로 패소했지만, '비밀 분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안보'에 직결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까지 자의적으로 거의 무조건 비밀로 분류해온 정부의 관행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근거로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농민단체들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한편 이번 정보공개 소송과는 별도로 헌법재판소에는 "개별국가의 협상안도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이 접수된 상태여서 결과가 주목된다.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쌀 관세화 유예 협상 비준안'은 통과됐지만, 비준안에 이번 소송에서 쟁점이 된 개별 국가들과의 협상안은 빠져 있다.
이에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9명은 "정부가 쌀 협상 관련 합의문서 가운데 부가합의문과 개별 이행합의문 등 두 가지를 국회 비준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국회의원의 조약에 대한 심의권한을 침해한 것"이라며 정부를 상대로 헌재에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냈다.
따라서 개별국가들과의 부가적이 협상안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조약'으로서의 효력을 인정할지 주목된다. 헌재가 해당 합의문을 '조약'으로 인정할 경우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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