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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살해 목적'으로 나를 납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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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살해 목적'으로 나를 납치해…"

"이후락 지시는 아니다"…'박정희 지시' 강하게 암시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초 지시자로 결론날 것으로 보인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 오충일 위원장은 27일 김 전 대통령의 증언을 토대로 이를 강하게 시사했다.

***DJ "대통령 지낸 사람으로 누가 지시자라고 언급은 못하겠지만…"**

국가정보원이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을 직접 면담해 '단순 납치냐, 살해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 전 대통령은 "살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오 위원장이 전했다.

오 위원장은 이날 KBS라디오 '라디오 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에 출연해 김 전 대통령이 "(살해 목적이라고 보는) 증거는 큰 가방과 끈 같은 것이 있었고 납치된 상태에서 배를 타고 올 동안 나무판에 자기 목을 꽁꽁 묶고 팔 다리 쪽에 무거운 물체를 매달았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오 위원장의 전언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단순 납치면 큰 배낭이나 돌까지 매달아 달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살해 목적인 납치의 최초 지시자와 관련해 "이후락 씨는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더욱이 김 전 대통령은 "나도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지시자가 누구라고 언급을 못하겠다"고 말한 대목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 지시라인의 정점임을 강하게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오 위원장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최대 정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며 "추론으로 진실이 규명되는 것은 탐탁지 않지만 정황으로만 보면 그것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동백림 사건 연루자 간첩 행위 흔적은 없어"**

한편 '동백림 사건'과 관련해 오 위원장은 당시 간첩으로 지목된 일부 인사들을 유럽에서 면담한 결과 "(이들이) 70년대 즈음 북한을 방문한 것은 다 사실"이라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그러나 "윤이상 씨처럼 유럽에 있던 사람들의 심정은 내 조국은 남쪽만이 아니고 북쪽도 내 조국이라는 생각에서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에도 불구하고 민족 양심에 의한 것이었지 그 사람들이 갔다 와서 간첩 행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따라서 이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면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명예회복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DJ 납치 사건'과 '동백림 사건' 조사 결과를 "1월 중에 발표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스 시작〉

***'김대중 납치사건'이란**

1973년 8월 8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된 사건이다.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73년 7월 민주화운동 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독재 활동을 했다.

사건은 도쿄 한민통 결성을 닷새 앞두고 발생했으며 당시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된 뒤 129시간 만인 8월13일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그 뒤 공식적으로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언론보도 등을 통해 당시 중앙정보부의 납치공작 전모가 드러난 바 있다.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른바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며 고(故) 윤이상 씨를 비롯한 예술가, 학자, 유학생 등 지식인들을 대거 간첩으로 몰았던 사건.

이응로 화백, 학계의 황성모 임석진 씨 등을 포함해 대학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 적화 공작을 벌이다가 적발됐다는 게 발표 요지다.

1967년 12월 3일 1심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외국환관리법 등이 적용돼 조영수 정규명 씨 등 2명에게는 사형이,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 씨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을 포함해 모두 다섯 차례의 재판을 거쳐 형량이 확정된 뒤 관련자들이 감옥에 있었던 기간은 길어야 2년 정도를 넘지 않았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었다.

이 가운데 복역 후 독일로 다시 나가 귀국을 포기한 채 민주화운동에 전념했던 정규명 씨는 최근 독일에서 타계한 것으로 국내의 지인들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몇몇 독일 및 프랑스 유학생들이 북한 또는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인 양 조작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67년 치뤄진 총선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끓어오르던 때에 이 사건이 터졌다는 점도 정권 차원의 기획이 아니냐는 의혹의 한 축이 됐다.

〈박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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