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탱크' 박지성과 '공격도 잘하는 수비수' 이영표는 둘 다 성실한 플레이와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유럽 축구의 심장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 축구의 특장점으로 인정받아온 지구력이 두 선수가 네덜란드를 거쳐 잉글랜드까지 진출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미 1970년대에도 한국 축구에는 박지성, 이영표에 못지않은 '체력의 화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라운드의 악바리'로 불리는 이영무 할렐루야 감독을 20일 저녁 축구단 숙소가 있는 경기 하남시의 한 식당에서 만나 '어제의 한국축구'를 바탕으로 '오늘의 한국축구'를 진단해봤다.
*** "지구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신장이 165cm, 체중도 57Kg 밖에 안 됐던 이영무 감독은 "내가 축구선수로 인정받고 성공하려면 지구력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중고등학교 시절 훈련할 때 "선착순에서 2등을 해도 실패라는 마음가짐으로 매일 학교 주변의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 개인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감독은 "박지성은 마라톤 선수를 방불케 하는 폐활량을 갖고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신앙의 힘과 노력이 나를 '악바리'로 만든 것 같다"며 웃음을 지었다.
또래보다 체격이 너무 작아 중학교 때 두 번이나 유급을 했던 이 감독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1972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이영무는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돼 축구선수로 첫 열매를 맺었다.
1974년 대표팀에 뽑혔지만 3개월 정도 훈련만 받다가 대표팀을 떠나게 된 이영무는 이듬해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 대표팀의 함흥철 감독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복돌이'. 이 감독은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역전골도 많이 넣고 지고 있을 때 동점골도 자주 넣어 이런 별명이 붙었다. 축구를 잘한다는 말보다 성실하다는 말이 듣고 싶었고 스코어에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고 그라운드에서 악착같이 뛰다 보니 함흥철 감독님도 나를 신뢰했다"고 말했다.
***이영무 감독과 '기도 세리머니'**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지난 1992년 목사 안수를 받았던 이영무 감독은 최근 '축구천재' 박주영 때문에 유명해진 '기도 세리머니'를 한국 선수로는 제일 먼저 경기장에서 보여준 주인공이다.
1975년 8월 메르데카컵 결승전에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은 뒤 이영무는 선수들에 둘러싸이는 바람에 많은 팬들이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무릎을 꿇고 골을 선사해준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영무 감독의 '기도 세리머니'가 널리 알려진 건 1975년 9월 28일 한일 정기전에서였다. 이 감독은 "사실 난 스피드도 없고 체격도 크지 않아 먼 거리에서 강슛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날 경기에선 약 30m에 이르는 터닝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고 나도 모르게 기도 세리머니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감독은 중동 원정경기에 유달리 강했다. 1977년 이란과 펼친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도 2골을 넣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란과 2대2로 비겨 월드컵 본선 진출엔 실패했다. 이 감독은 "이 경기에서 첫 골을 성공시킨 뒤 기도 세리머니를 했고, 그때 아자디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12만여 관중들은 침묵했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날씨가 무더운 중동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내 장점이 잘 나타났다. 한 경기에서 가로채기를 5번 정도 할 정도로 부지런했던 내 플레이가 원동력이 되어 팀의 사기를 북돋웠고, 그래서 자연스레 골 기회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1970년대에 한국은 중동에서 공사를 많이 따내야 했다. 이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정부 관계자가 '이번 중동 원정경기에서 기도 세리머니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했다"고 밝혔다.
***이영무 감독이 본 차범근과 박주영**
이영무 감독은 1978년 차범근(현 수원삼성 감독)과 체육인교회를 같이 다녔고 지금은 차범근 축구교실 이사를 맡고 있는 등 차범근 감독과 각별한 사이다. 또한 이 감독은 박주영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성화 전 청소년대표팀 감독에게 "좋은 선수가 있으니 한번 테스트 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박주영이 청소년대표팀에 뽑히는 데 가교의 역할도 했다.
이 감독은 "차 감독은 한국 축구의 국보적 존재다. 센터포워드와 윙 역할을 모두 잘 하는 차 감독은 당시 분데스리가 스타일에 딱 맞는 선수였다. 차 감독은 폭발적인 스피드뿐 아니라 지구력도 갖추고 있었다. 차 감독은 집, 축구장, 교회 밖에 모를 정도로 훈련에 집중했고, 팀 훈련이 끝난 뒤에도 헤딩 슛, 중거리 슛 등의 개인훈련을 쉬지 않고 하는 노력파였다"고 평가했다.
이 감독은 이어 "박주영이 고등학교 2학년 때 할렐루야 축구팀과 1주일간 같이 훈련한 적이 있다. 박주영은 기본기가 아주 잘 돼 있었고 경기장에서 판단력과 볼 센스가 매우 뛰어났다. 향후 박주영이 조금만 더 실력을 가다듬으면 차 감독이 분데스리가에서 했던 것만큼의 활약을 유럽 무대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197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던 덴마크 출신의 알란 시몬센과 동시대의 브라질 공격수 토스타오를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로 꼽았다. 이 두 선수의 공통점은 이영무 감독과 같이 키가 160cm대라는 점을 비롯해 체격조건은 좋지 않지만 자기 나름의 스타일로 축구계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프로축구 2부리그(K2 리그)에 속한 할렐루야가 2007년 이후에 반드시 1부리그로 진입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감독은 "현재로는 1부리그에서 다른 팀과 경쟁을 할 수 있을 만큼 할렐루야의 재정상태가 탄탄하지 않지만 향후 할렐루야가 2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기독교계 기업들과 교회에서 도움을 준다면 1부리그 진출이 꿈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영무 감독 "한국 축구, 체력과 지구력 연마에 매진해야"**
이 감독은 월드컵 4강을 발판으로 한국 선수들의 개인 능력은 많이 향상됐지만 향후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남보다 한 발 더 뛸 수 있는' 체력과 지구력 향상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이 감독은 "내가 뛰던 시절과 달리 한국 선수들은 체격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체격과 체력은 엄연히 다르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체력이었다. 당시 한국은 체력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며 끊임없는 압박을 해 유럽 강호들을 당황시켰다. 특히 공에 대한 집중력은 대단했다"고 분석했다.
이 감독은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9개월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하다. 또 선수들이 함께 모여 훈련할 시간도 많지 않다. 하지만 선수들이 각자 소속팀에서 성실하게 체력 훈련을 해주고 대표팀 소집시에 조직력을 정비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한국 선수들의 기술적 능력은 많이 개선됐지만 축구 선진국에 비해서는 아직 개인기가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스타 의식을 버리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성실한 자세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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