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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과 北'으로 갈린 독일 축구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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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과 北'으로 갈린 독일 축구 지형도

[프레시안 스포츠]바이에른과 보루시아의 격전장

독일의 축구클럽들은 '애향심'을 표현하기 위해 팀 명칭에 도시 이름뿐 아니라 지역 이름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 바이에른, 보루시아, 작센, 슈바벤 등이 좋은 예다. 이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대립관계였던 남부의 바이에른과 북부의 보루시아(프로이센) 지방의 라이벌 의식이 특히 대단해 이는 독일 축구 지형도가 남과 북으로 갈리는 계기로 발전했다.

이같은 독일 축구의 지형도가 2006년 독일월드컵에도 반영되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아직도 살아 남아 월드컵 진행상의 미묘한 신경전을 낳고 있는 독일 축구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보자.

***바이에른 뮌헨 대 보루시아 MG…독일축구의 南北전쟁**

1867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중심이 돼 북부 독일 연방을 결성한 프로이센은 독일내 주도권 싸움에서 바이에른을 압도했다. 끝내 1871년 최초의 독일 통일도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 하지만 독일 남동부에 위치한 바이에른은 문화적 우위를 자랑하며 지금까지도 바이에른이 독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뮌헨을, 독일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보지 않으면 안되는 도시로 만들 것"이라고 말한 바이에른 왕국의 루드비히 1세의 말처럼 바이에른은 독일 축구에서도 중심축이 됐다. 독일 국가대표 선수의 산실인 바이에른 뮌헨 때문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이 맹활약하며 1974~76년 챔피언스 리그를 3연패했고 자국에서 열린 74년 월드컵에서도 이들이 주축을 이뤄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독일인들이 이 '스타군단' 바이에른 뮌헨을 보는 시각이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 축구의 강자로 떠오를 무렵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MG)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70년대 초 유프 하인케스, 빠른 발을 가진 공격수 베른트 루프, 축구에 열정이 남다른 고아 출신의 베르티 포크츠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했다. 평균 연령이 채 22세가 안되는 보루시아 MG는 역습을 주 공격 스타일로 삼았다. 팀의 역습작전을 주도한 선수는 야전 사령관 귄터 네처. 단 한 번의 패스로 상대 수비를 무력화 시키는 네처의 스루패스는 예술 작품과 다름 없었다.

이로써 1969~77년 분데스리가의 왕좌를 나눠 가진 바이에른 뮌헨(4회)과 보루시아 MG(5회)의 대결구도가 관심을 끈 건 상반된 지역 정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1968년 서독의 대학생들은 독일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전국적으로 거대한 학생운동의 물결을 이루었다. 이른바 68혁명이었다. 이때 집회를 이끈 루디 두취케가 저격 당하면서 극에 달한 학생운동은 더욱 급진적인 물결을 타게 됐고, 이런 분위기는 정치, 철학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뒤 독일인들은 보루시아 MG는 '개혁과 급진주의' , 바이에른 뮌헨은 '이성과 실용주의'의 상징으로 여겼다.

보루시아 MG는 다소 투박하지만 정열적이고 기지가 돋보이는 플레이를 했고 바이에른 뮌헨은 좀 더 조직적이고 경기 상황에 잘 적응하는 운영을 해 와 그런 상징물로 여겨질만도 했다. 이렇게 두 팀의 특징이 나뉜 이유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 보루시아 MG 선수들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이런 바이에른 뮌헨의 '실용주의'와 보루시아 MG의 '급진주의'가 축구 전문가들의 이분법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항상 자신감 있게 경기장을 누비는 바이에른 뮌헨 팀을 기성세력으로 치부했고 기술적으로는 바이에른 뮌헨에 못미치지만 정열과 투지가 돋보인 보루시아 MG를 개혁세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베켄바워와 네처의 엇갈린 운명**

사람들이 보루시아 MG 팀을 '개혁과 진보'의 상징이라고 보았던 이유는 귄터 네처 때문이기도 했다. 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골을 성공시킨 후 기뻐하는 네처의 이미지는 독일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분데스리가의 올드 팬들이 베켄바우어를 제쳐 놓고 귄터 네처를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꼽는 데에는 그의 야생마 같은 매력적인 이미지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절묘하게 휘어지는 프리 킥과 상대 수비진의 약점을 한 눈에 간파하는 천재적인 게임 비전을 가진 귄터 네처는 대표팀에서 베켄바워와 호흡을 맞추며 서독의 197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주도했다. 서독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매료된 해외 언론들도 이 소식을 타전하기에 바뻤다. 영국의 <더 타임즈>는 서독팀을 '우아함과 창조성'으로 표혔했고, 프랑스의 <레퀴프>는 '유럽에서 서독을 능가하는 팀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루시아 MG의 귄터 네처는 선수,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바이에른 뮌헨의 프란츠 베켄바워와는 달리 월드컵 역사에는 이렇다 할 활약을 못했다. 네처는 동독과의 예선전에서 부진한 플레이를 해 주전 자리를 뺏겼다.

1974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서독을 위해 네처가 한 일은 서독팀 자체 청백전에서 네덜란드의 또 다른 천재 요한 크루이프 역할을 하면서 서독 수비수들을 훈련시킨 것뿐이었다.

***남과 북으로 나뉜 독일 축구전쟁은 현재진행형**

남북으로 갈린 독일 축구 지형도는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을 다른 도시에서 분리해 치르기로 결정한 것에도 잘 나타난다. 독일 정부와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개막식은 베를린에서, 개막전은 뮌헨에서 치르기로 결정했고 FIFA(국제축구연맹) 제프 블라터 회장도 "2006년 월드컵 개막식은 개막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6월 8일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릴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뮌헨 시는 "축구 경기가 없는 베를린에서의 개회식과 개회식 없는 뮌헨의 월드컵 개막전에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베를린은 월드컵 결승전 장소이기 때문에 개회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초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은 뮌헨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사민당은 지난 2002년 총선에서 맞붙었던 기독사회당의 당수인 에드문트 슈토이버(현 바이에른 주 주지사)가 독일 월드컵의 수혜자가 되는 걸 걱정해 개막식과 개막전의 분리개최를 택했다는 게 뮌헨 사람들의 일반적 시각이다.

공교롭게도 기독사회당을 이끄는 슈토이버는 독일의 명문 축구클럽 바이에른 뮌헨의 골수팬이며 슈뢰더 총리는 '안티 바이에른 뮌헨'의 첨병으로 엄청난 팬 층을 자랑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광적인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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