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당의 대통령후보가 수락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부정부패 없는 나라,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나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대접받는 나라, 뛰는 사람 격려해주고 뒤쳐진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연설 현장에는 초대받은 '국민의 대표'들이 있었다. 13세 소녀가장, 중년의 장애인, 실향민 할아버지, 실업자 일가족, 영호남 부부 등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누구의 수락연설일까? 한 번 알아 맞춰 보시라.
현재까지 정당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사람은 둘밖에 없다. 그럼 노무현? 발언 내용이나 '초대손님'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어딘가 '진보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크게 잘못 짚었다. 이 수락연설의 주인공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다.
이회창 후보의 수락연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비판이 제기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노무현 후보와의 대립 초점을 '색깔'에서 '부패'로 옮겼다는 정도의 객관적 해설 말고는 별 이야기가 없다. 대통령직이라는 높은 목표에 도전하는 정치인의 출사표인 만큼, 후보 수락연설에 대해서는 그저 덕담이나 해 주는 것이 언론계의 '미풍양속'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상한 '미풍양속'을 준수할 뜻이 없다.
이회창 후보가 그런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것이 온 국민의 꿈이라는 이 후보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확실히 그와 같은 꿈을 꾼다. 오래 전부터 그런 꿈을 꾸며 살아온 분들을 주변에서 무척 많이 보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후보의 아름다운 말이 내 마음 속에서는 어떤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슴에 제대로 와 닿지도 않았다.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하면 이회창 후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회창 후보 개인과 그가 총재로 있었던 한나라당이 보여주었던 언행 가운데 여기 인용한 수락연설과 어울리는 것이 있는가?
동생과 측근들이 연루되었던 이른바 세풍사건에 대해 이 후보는 진솔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가 부정부패 없는 나라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으란 말인가. 두 아들의 병역문제와 호화빌라 파문에서 이 후보는 '준법정신'을 보여주었는지 모르겠으나 다수 국민이 동의할만한 '상식과 원칙'을 보여준 바 없다.
진정 '뒤쳐진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해 주는 나라'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의 복지지출 확대를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비난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정치적 수세에 몰릴 때마다 영남권에서 장외투쟁을 여는 일은 삼갔어야 마땅하다.
"대통령 일가와 집권세력이 부정부패의 늪에 빠져 있"으며, "이처럼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이 후보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너무 냉혹한 것 같아서 내놓고 말하기가 뭣한 일이지만, 대통령이 월드컵 끝나면 곧바로 하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영이 서지도 않고 국민의 신뢰도 받지 못하는데, 임기 말까지 청와대에 머물러 봐야 대통령 자신에게도 부담이 되고 국민에게도 짐이 될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비판의식이 곧 이회창 후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연결될 필연성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확실하게 퇴장할 사람이다. 맞대결 상대인 노무현 후보는 김대중 정권의 실세도 아니었고 민주당의 주류도 아니었다.
이회창 후보는 공세의 초점을 '김대중의 부패'에서 '노무현의 정책'으로 다시 옮기는 것이 좋겠다. 무려 4년 넘게 김대중을 물고 늘어졌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도 계속해서 엉뚱한 상대와 싸울 생각인가.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른다'는 헛된 망상도 버리는 게 현명할 것이다. 보수면 보수답게, 진심이 들어간 보수적인 정책으로 제대로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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