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에게 욕을 먹어서 그렇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는 방식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니냐."
노 대통령이 지난 6월말 '연정'을 제안한 이후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도 정국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현재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내부가 요동치는 모습을 볼 때 결국은 정국 상황이 노 대통령이 제시한 '시간표'대로 흘러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연정 정국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민주노동당 관계자의 관측이다.
이처럼 계속 '연정론'을 제기해 '정치권 흔들기'에 성공한 노 대통령이 이번엔 '2선 후퇴' '임기단축'이란 화두를 던져 '개헌론'을 촉발시켰다.
***"'연정론'이 아니라 '정치개혁론'…대선ㆍ총선 시기 맞추는 것도 대안"**
노 대통령은 31일 중앙언론사 논설.해설위원단과 간담회에서 "(연정이) 안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전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것은 또 다음에 말을 잘못하면 또 오해가 생길 수 있고 해서 접어 놓겠다"고 말했다. 이는 '연정론' 이후 새로운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암시로 읽혔다. 노 대통령은 또 "'연정론'이 아니라 '정치개혁론'"이라고 말해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연정' 대신 '정치개혁'이란 명분을 내세워 향후 정국을 주도할 것임을 시사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이날 연정 이후의 전략에 대해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노 대통령이 "교착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또는 정치문화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며 "다음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가깝게 붙어 있기 때문에 그때 가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임기가 같아지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한 대목이 주목받고 있다.
노 대통령이 '2선후퇴' '임기단축'이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 아니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와 헌법이 유사한 프랑스가 그렇게 했다"고 밝혔는데, 프랑스는 지난 2000년 개헌을 통해 2002년 대선부터 7년이던 대통령 임기를 국회의원 임기와 같은 5년으로 바꿨다. 당시 좌-우 동거정부의 비효율성에 염증을 낸 국민들은 대통령 임기와 의원 임기를 똑같이 해 '동거정부'의 탄생을 막는 개헌안에 찬성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말하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임기가 같아지도록 하는 것"의 의미가 대통령 임기를 의원과 동일한 4년으로 줄이는 것, '4년 중임제'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것이다.
***2007년 조기대선ㆍ총선 염두에 둔 발언?**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개헌론'으로 확대 해석되는 이유는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이 지난 1981년 이후 거의 20년만에 거의 같은 시기에 치러질 예정이라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음 대선은 2007년 12월에, 총선은 2008년 4월에 치러지게끔 되어 있다.
6월 항쟁으로 촉발된 87년의 개헌은 독재와 장기집권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5년 단임제'에 초점이 맞춰졌었다. 현행 '5년 단임제'는 장기적 국정운영 구상이 불가능하고 집권 3년차 이후 레임덕 현상이 오는 등 안정적 국정운영이 힘들다는 폐단이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다. 따라선 정치권에선 '4년 중임제'에 대한 요구가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4년 중임제' 개헌으로 대통령과 의원의 임기를 맞춘다 할지라도 세부적인 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선이 총선보다 4개월 가량 먼저 치러진다는 점이다. 대선 직후는 대통령의 지지도가 대개 80%를 상회하는 가장 높은 시기다. 따라서 대선 후 4개월만에 총선을 치르면 여당이 압승을 할 가능성이 높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은 총선에서도 패배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이들은 국회의원 임기를 단축시켜 미국처럼 대선과 총선을 함께 치르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300명에 가까운 의원들이 자신들의 임기 단축에 선선히 동의해줄 것이냐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 대통령이 '임기단축'이란 카드를 꺼냈다고도 보인다. 대통령의 '임기단축'은 의원들에게도 임기를 포기하는 '결단'을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 되고, 동시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동시 '임기단축'이란 모양새로 연출되는 정치권의 '대결단'은 국민들에게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할 명분도 충분히 된다는 계산인 것이다.
***노대통령 "2006년 개헌 논의 시작, 2007년 이전 마무리" 시간표 제시**
'개헌'과 관련해 노 대통령이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둔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청와대에선 연정이 성사됐을 경우 야당 출신의 총리가 일상적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지만 노 대통령이 '2선 후퇴'를 말한 것도 개헌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다. 대통령의 '2선 후퇴'는 노 대통령이 여러 차례 직접 언급한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내각제 개헌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은 31일 "내각제 문제는 오늘 대답을 피하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잘못하면 정국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리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각제 얘기에 대해서는 별 의견이 없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지금 내각제에 대해 어떤 결심이나 판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지만 명시적으로 "반대한다"고 하진 않았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 이미 개헌과 관련해 '2006년 개헌논의 시작, 2007년 이전 마무리'라는 시간표를 제시한 바 있다.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해 온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 역시 "2006년 초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등으로 구성된 '헌법개정연구위원회'를 통해 개헌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해 5월 지방선거 이후 국회 내에 '개헌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2007년 초까지 국회 내 합의를 마치고 2007년 3월께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상세한 밑그림을 제시한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이 "연말까지 연정 제안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같은 '개헌 시간표'를 미리 상정하고 한 말로도 볼 수 있다.
***청와대 "노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해 어떤 지시도 내린 바 없다"**
물론 청와대는 '개헌론 확산'을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1일 "노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과 관련해 지난 6월 초 참모진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는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개헌 쪽으로 몰고 가지 말라"며 "노 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한 어떤 지시도 내린 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미 '개헌론'으로 술렁이고 있다. 9월 1일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 개헌 문제는 여야간 주요 이슈가 될 전망이다. 특히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정치개혁은 내각제 개헌론"이라며 "노 대통령이 탈당 하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개헌 정국'은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노 대통령이 연정론을 통해 던진 정치개혁의 화두가 일정 부분 궤도를 타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헌 논의의 수렁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발 한발 빠져들어가고 있는 정치권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헌 논의 과정은 불가피하게 권력구조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수반할 것이고, 그런 가운데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연정론이 함축하는 이른바 정계개편과 차기 정권을 향한 모색 역시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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