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엽기 드라마가 대박을 터뜨렸다. 드라마의 제목은 "나는 네가 지난 여름 술 먹고 한 말을 알고 있다." 빅3 종이신문이 노무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연출한 이 드라마의 핵심을 어느 네티즌은 이렇게 요약했다.
"지진이 나면 63빌딩이 어떻게 될까요?"(어느 기자) ⇒ "63빌딩도 붕괴할지 모르죠."(어느 후보) ⇒ "어느 후보가 집권하면 63빌딩을 붕괴시킨다고 했다."(다른 후보) ⇒ "대화 중에 '63빌딩 붕괴'라는 표현 있었다."(어느 기자) ⇒ "어느 후보의 '63빌딩 붕괴' 발언 사실로 밝혀져."(어느 신문)
이 엽기 드라마의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푸른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장기표 대표다.
나는 장 대표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 그는 민통련과 전민련 등 198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의 핵심이었다. 매사에 진지하며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욕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끌어안고 교정해 주려고 노력한다. 실패를 거듭하긴 했지만, 세 김씨의 패거리 정치에 맞서 민중당을 창당한 것 역시 그다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장 대표는 젊은 날의 그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선택을 한다. 우선 재작년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씨 등과 함께 민국당을 만든 게 그랬다. 실패로 말하면 민중당 실험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른바 '영도다리 퐁당론'을 거론하는 낡은 정치인들과 손잡았다는 면에서 명분도 썩 아름답지 않았다. 이번 '언론사 국유화 발언 파문'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내가 알던 장기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장 대표는 1998년 문을 연 홈페이지(www.welldom.or.kr)에서 '문명의 전환'과 한국정치의 개혁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방침을 밝히는 한편, 여야 대선 주자들의 인물평을 비롯해 여러 정치 사회적 현안문제에 대한 논평을 수시로 올리고 있다.
장 대표가 보기에 DJ는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좋았을 사람이다. 이회창씨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이인제, 박근혜, 노무현 등도 '대통령이 되어서 좋을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다. 이런 거야 근본적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장 대표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언론사 국유화 발언 논란'에 대한 논평을 보면 도대체 장 대표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정치개혁을 하려고 하는지 무척 걱정스럽다. '문명의 전환'에 대응한 근본적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최소한의 상식과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장 대표 자신의 논평에 이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노 후보는 문제의 발언을 한 일이 없다고 하나 노 후보의 해명을 들어보면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여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명쾌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이건 정말 대단히 용기 있는 주장이다. 이인제 후보의 주장에 인용부호를 붙여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삼기는 했지만, 싸움의 당사자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조차 이렇게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장 대표의 이러한 '확신'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혹시 언론에 보도된 것 말고 다른 증거가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그런 건 없다. 그는 동아·조선이 보도한 바로 그 내용을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런 '틀림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장 대표에게는 무한정한 해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해석을 위해서는 먼저 확증된 사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식과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혹을 제기한 쪽을 향해 먼저 사실 여부를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주장하는 쪽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확정된 사실의 근거 없이 해석의 영역을 무작정 확대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몽상가라 한다.
장기표 대표께 간곡히 권한다. 당신은 정치와 언론에 이해관계를 걸고 있는 사람입니다. 논평을 하기에 앞서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평범한 네티즌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세상이 훨씬 더 잘 보일 것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