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바쁜 이우 아이들**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아닙니까?" 이우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대화 도중에, 우리나라의 최고 명문으로 손꼽히는 모 대학의 입학관리 담당자가 저에게 한 말입니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정말 그런가?
우연히 한 학생의 수첩을 보게 되었습니다. 각종 수행평가 과제, 모둠별 발표 준비, 동아리 활동, 인턴십과 NGO 수업 관련 활동, 심지어 음식만들기 재료 준비까지 빽빽하게 일주일의 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우학교에서는 학생 중심의 탐구식·토론식 수업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개인별, 모둠별 발표와 토론이 거의 모든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뿐 아니라 생협, 인권동아리, 환경동아리, 밴드부와 같은 동아리, 그리고 각종 자치활동(학생회 집행부 및 대의원회의, 체욱대회준비위원회, 축제준비위원회, 작음음악회 준비…) 등 숱한 활동 과제를 수행합니다. 학생 수가 적고 하는 일이 많다 보니, 한 학생이 여러 분야의 활동에 겹치기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주로 주말을 이용하여 인근 지역의 NGO 활동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고 2의 경우 자신이 희망하는 진로 분야를 선택하여 인턴십을 체험해야 하고, 고 3은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끔씩 만나는 학부모님들은 선생님들이 너무 바빠서 쓰러질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학생들이 더 바쁩니다. 집에서 맛있는 것 많이 해 주세요."
***이우학교, 혹은 내가 꿈꾸는 교육**
"이우의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길 원하십니까?" 가끔씩 듣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학부모로부터, 혹은 교육 관계자로부터, 기자들로부터, 최근에는 고등학교 학생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저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살다보면, 무슨 일을 하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주어진 일에 대해 능동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 사회를 폭넓게 이해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남과 더불어 어떤 과제를 수행해 낼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함께 하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이런 사람들, 미안한 이야기지만, 현재의 공교육 내에서 쉽게 배출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점이, 저로 하여금 이우학교 설립에 참여하도록 만들었고, 지금도 이우학교의 교사로 일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결혼할 때 부모님들이 다섯 명의 후보자를 데려와 그 중에서 고른다." 학교 다니는 동안 배운 게 5지 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을 고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웃어제끼면 그만이지만, 그 우스개 소리에는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웃음 뒤에 짙은 우울함이 묻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 특히 도시의 아이들은 대부분 80년대 고도성장기에 핵가족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욕망의 좌절을 별반 경험하지 못 하였고, 특별히 어떤 노력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 욕구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핵가족 하에서 자신의 안락함 외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 사회적 책임감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 최고 수준의 IT문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헐리웃과 맞선다는 영상 산업의 무차별적인 영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가변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차분히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과 끈기를 갖춘 아이들이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학교는 어떠한가요? 모든 교육이 대학 입시에 종속되어, 자신의 내적 동기보다는 획일화된 평가 기준에 맞춘 문제풀이식 수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교육의 목표가 실종된 지 오래고, 기본적인 사회 체험이나 인성 교육, 진로 탐색 등도 늘 입시 교육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그뿐 아닙니다. 입시에서의 성과를 위해 성적 부풀리기, 주례사 수준의 추천서가 남발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료는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 그리고 학교의 성적표이다"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갑니다. 학교가 정직을 포기한 사회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대학에서도 요즘 난리입니다. 높은 점수를 받고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들 중에 리포트를 쓸 줄 모르고, 기본적인 대학수학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교육을 통해 잘 정리된 내용을 암기하고, 선다형 객관식 문제의 오답 피하기 훈련을 통해 높은 점수를 받고, 한껏 부풀려진 내신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입니다.
그 졸업생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청년들이 자라나던 고도성장사회가 아닙니다.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저성장사회로 진입하였습니다. 만성적인 청년실업과 캥거루족의 탄생,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학교 교육의 실태가 교묘히 결합해서 낳은 비극적 결과입니다.
학교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실업자들이 즐비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일자리가 없다"는 외침 바로 옆에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이우학교의 학생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청년'으로 성장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히 '교육의 정상화'라고 부릅니다.
물론 속마음으로야, 그보다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앞가림만을 하지 않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높은 책임감을 갖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졸업생도 몇 명쯤 나왔으면 합니다.
언젠가 젊은 선생님들과의 술자리에서, 저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이라는 80년대식 어법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율과 방종 사이**
어떤 교육적 의도와 실천이 반드시 동일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은, 교육을 하다보면 늘 뼈저리게 느끼는 명제입니다. 이를 한 기업가는 "교육에서는 투입과 산출이 다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육은 카오스의 세계처럼 보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온갖 원인들을 분석하여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아내듯이, 교사 역시 학생들의 여러 특성들을 최대한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적절한 교육적 방법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그렇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예컨대 이우학교에서 때로 '자율'은 '방종'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 학급 청소는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운동화를 신고 버젓이 교실을 활보하는 학생, 모둠별 과제 수행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빠지는 학생, 모든 일에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주변을 힘들게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일반학교였다면 아마도 강제적인 규율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자제했을 법한 경우에도, '대안학교이기 때문에' 마음껏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아직 대안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대부분 도시의 중산층 출신들이라서, 일반학교보다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들은 그러한 학생들의 행위로 인해 괴로워하고 절망합니다. 때로 '대안'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변합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교사는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그것도 동일한 학생에 의해 발생하면 그 믿음에 대해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들의 술자리에서는 늘 그러한 고민이 오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은 때로 교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가슴 깊이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방종'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끝없는 이기적 욕심도 교사와 학교를 지치게 만듭니다. 대안교육를 찾는 학부모 중에는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공부도 잘 하고(그래서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한 소망을 탓할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행복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 학생들이 진정으로 지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노력 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한, 그러한 소망은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아니 때로 자기 자식과 학교를 모두 망치는 범죄와 같은 행위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 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개인과 학부모로서의 개인이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교육의 공적 가치를 말할 때의 관점과 자기 자식의 이해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상반되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 사회의 규범의 아노미,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저는 얼마 전 고등학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농사로 치면 유기농산물을 생산해서 세상에 내놓고 싶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부가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물론 이우학교의 학부모님들 중에는 정말로 학부모 이전에 인생 선배로서, 동지로서 훌륭한 분이 많습니다. 이우학교가 현재보다 더 발전한다면, 그 이유는 이우학교에 '훌륭한 어른'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심지어 교사들에게도, 여전히 이기주의적 욕망이 꿈틀대는 낡은 학교의 모습이 남아 있고, 그 모습은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충돌합니다. 어쩌면 이우학교야말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순, 자율과 방종이 공존하고, 교육의 공적 가치와 이기적 욕망이 부딪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늘 고민합니다. 학생 선발 방식부터, 카오스에서 질서를 발견하듯 보다 치밀하고 정교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문제, 그리고 비공식적 교육과정이라 부를 수 있는 학교의 일상적인 생활 관습 혹은 문화적 전통을 만들어가는 문제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교사들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 스스로 삶 속에서 이우학교의 이념을 구현하지 위한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교육의 성패는 교사의 삶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였는가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곧 교사의 삶이 학생들에게 복제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저는 이따금 교사들과 술자리에서 나누곤 합니다.
***내가 이우에 있는 이유**
"궁극적으로 이우학교가 어떤 학교가 되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대안적 삶을 실현하는 하나의 진지가 되길 원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것뿐 아니라, 이 삭막한 도시에 공동체적 삶의 가능성을 실현해 보는 것입니다. 다시 80년대식 어법으로 말하면, 전자가 최소강령이고 후자가 최대강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략이 없는 전술이 무의미하고, 전술이 공허한 전략이 도상 계획에 지나지 않듯이, 양자는 두 개이면서 하나입니다.
어른들의 더불어 사는 삶이 곧 아이들에게는 산 교육이고, 또한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막천 살리기 운동, 학교 밖 생활협동조합, 마을 어린이 학교 등 이우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많은 활동들은 지역공동에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것이고, 그 자체로서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들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이우학교와 같은 학교를 전국에 10개만 세우자, 앞으로는 너희들이 그 학교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꿈이 없다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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