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지역 경선을 치르는 동안 민주당 국민경선 양상은 양강구도로 굳어졌다. 아직 남아 있는 다섯 후보들 가운데 네 곳 모두에서 골고루 많은 표를 얻은 후보는 이인제와 노무현 둘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마지막에 웃게 될지는 끝까지 지켜봐야 알겠지만 당선자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흥행대박 정치드라마'로 만든 인물은 단연 광주에서 1위를 한 노무현 후보다.
노무현은 여러 가지 '흥행요소'를 가진 정치인이다. 우선 대학을 나오지 않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입지전적 이력이 그렇고,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보여준 활약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남아 있다. 거듭되는 낙선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했고, 대규모의 자발적 팬클럽을 가진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점도 매우 독특하다.
억세고 투박한 경상남도 사투리를 쓰는 노무현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광주 경선에서 승리한 데는 여러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딱 하나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강력한 본선 경쟁력'을 강조한 노 후보의 주장을 광주 선거인단이 수용한 것이라고 본다.
자신이 전국에서 골고루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빼놓지 않고 "영남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이 때문에 정치철학과 노선이 가장 비슷하다는 김근태 의원에게서까지 지역주의를 조장한다는 의심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자신이 영남 출신이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로서 영남표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노무현의 주장은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것인가? 다른 경선 후보들의 광주 경선 연설을 보면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자리는 지역 대표를 뽑는 자리가 아니다. 영남후보여야 한다, 호남후보여야 한다는 지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이인제 후보) "사람들은 호남사람이 또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이것은 패배주의다.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광주 민주정신이 세계정신이 될 수 있다."(한화갑 후보)
나도 노무현의 경선전략에는 지역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단히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운 역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정치인들의 지역주의 선동은 같은 동향사람이라는 원시적 유대감을 과시함으로써 자기의 고향에서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이자 다른 지역 출신 경쟁자에게는 표를 주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영남에 자기의 표가 있다는 주장을 통해서 노무현이 얻으려 한 것은 영남이 아니라 호남의 민심이다. 자신이 영남 출신임을 강조함으로써 호남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 이것이 노무현의 영남 득표력 논리가 내포한 지역주의적 요소의 역설적 측면인 것이다.
광주 경선 승리는 노무현이 이 역설적 논리로 광주 선거인단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시민들이 이 역설을 받아들인 것은 지역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부당한 차별과 고립을 경험했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호남지역주의라는 비난이 나왔다.
오랜 연고를 가진 한화갑 대신 영남과 충청 출신 노무현 이인제를 1등과 2등으로 만든 광주 경선의 결과는, 자기네가 추구하는 것이 김대중이라는 '호남 출신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주의, 평등, 국민화합과 같은 '가치'였음을 보여주려 한 광주시민들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한 마디로 광주 시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통해서 지역주의와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하고 영남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전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에 먹구름을 드리운 사건이다. 3월 30일부터 시작되는 영남지역 경선에서 '대전 몰표'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후보의 몰표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인제 후보는 대전 경선 직후 인터뷰에서 예상을 뛰어넘은 득표를 가리켜 '다른 변수가 작용하기 어려웠던 순수한 민심의 발로'라고 평가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진심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만약 진심이라면, 그는 아직도 자신이 왜 광주 경선에서 패했는지 모르고 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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