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총재의 방미 기간 중 미국 정부가 이 총재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점이 뒤늦게 정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이 이 총재를 차기 대통령으로 미는 것 아니냐”는 말이 조심스럽게 퍼질 정도다.
이 총재는 지난 21일부터 28일까지 6박7일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 총재로서는 최초의 미국 방문이며, 지난해 말 러시아 방문에 이어 ‘4강외교’의 두 번째다. 상반기중 일본과 중국 방문 계획도 세워둔 상태다.
그런데 이번 방미 기간 중 이 총재는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해 콜린 파월 국무장관, 리차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폴 월포비츠 국방부 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정부 핵심 고위직을 두루 면담했다. 또 아직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안보보좌관과도 만났다.
뿐만 아니라 조셉 바이든 상원 외교위원장과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하원의 데니스 해스터트 의장과 크리스토퍼 콕스 공화당 정책위의장, 토마스 딜레이 공화당 원내총무 예정자, 리챠드 게파트 민주당 원내총무 등 미 의회 여야 지도부도 만났다. 또 미 정·관계 및 경제계 거물급 인사들의 모임인 대외관계협의회(CFR)의 한국 태스크포스도 만났다.
야당 총재가 미국을 방문해서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미 행정부의 태도다.
그간 미국 정부는 한미간 외교 관계 등을 고려해서 야당 총재를 직접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왔다. 역대 야당 총재의 방미에서는 국무부 과장급, 잘해봐야 차관보급 정도를 만나고 온 것이 관례였다.
특히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엔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여야를 합쳐 대선 예비 주자가 여럿인데 특정 주자만을 만날 경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측은 딕 체니 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직접 이 총재를 면담하는 파격적 대우를 한 것이다.
그간 전례가 없던 일이다. 특히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역대 부통령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는 부통령으로 평가된다. 또한 현재 아프간과의 대테러전쟁을 총지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이번 딕 체니 부통령과 이 총재와의 직접 면담은 분명 파격적인 대우로 평가된다.
왜 그랬을까?
***“미 지도부 이 총재 개인에게 관심 많더라”**
이번 이 총재의 방미 일정을 주관한 한나라당의 박진 특보는 30일 “여러 측면에서 미국측이 이 총재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면담을 요청했는데 이렇게 모두 성사될지는 우리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미국 지도부가 이 총재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비전과 철학을 갖고 있는지 관심이 많더라”고 말했다.
“체니 부통령은 라이스 안보보좌관이나 아미티지 부장관 등을 통해 간접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지금 아프간과의 대테러전쟁을 총책임지고 있어 몹시 바쁜 상태다. 그런데도 가능하면 직접 이 총재를 만나 이 총재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의 기준을 갖고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날 면담 분위기도 매우 편안하고 호응도가 높았다.”
“파월 국무장관의 경우 원래 이 총재 방미 기간 중 일본에서 열린 아프간 대책회의 참석 때문에 워싱턴에 없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미티지 부장관을 만나고 있는 도중 파월이 일본에서 막 귀국하는 길로 아미티지 부장관 방으로 직접 와서 이 총재와 면담했다. 그래서 그날 아미티지 면담 일정은 결국 파월 면담으로 바뀌고 만 셈이다.”
박진 특보의 얘기다.
미국이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주요 동맹국이고 매우 중요한 국가다. 그런데 최근 미국으로선 불안스러운 대목이 있었다. 대북문제 놓고 껄끄러운 관계가 벌어졌고, 한국에서의 일부 반미감정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사람이 많더라. 이런 상황에서 DJ정부 임기말을 맞아 새로운 한국정부는 누가 맡을 것인지 관심이 많고, 야당 총재이며 유력한 후보감인 이 총재에게 높은 관심을 보인 것 같다.”
***“주미 대사관에는 전혀 도움 요청하지 않았다”**
“혹시 한국정부가 이번 이 총재의 방미일정을 주선하는 데 도움을 준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번 이 총재의 방미 일정이 화제가 되자 정가 일부에서는 “김 대통령이 도운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해 김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 이후 여러 차례 등장했던 ‘DJ의 철저 중립’, 한발 더 나가자면 ‘DJ의 퇴임 후를 고려한 이 총재 지원설’에 근거를 둔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을 배경에 깔고 한국정부의 도움이 없었는지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답은 예상대로였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나라당으로선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대사관에는 전혀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지난번 러시아 방문 때 일로 대사가 경질되는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일체 요청을 하지 않았다. 양성철 대사가 공항 영접과 출영을 하고 업무 오찬으로 현지 정세를 브리핑하는 등 의례적 일만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이 총재의 파격적인 방미 일정은 우리 정치에 여러 가지 파장을 미치게 될 전망이다.
미국의 독자적인 판단인지, 아니면 일정 주선 과정에서 한국정부와의 협의가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정가의 화제는 계속될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국내정치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을 아직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