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모조간 1면 톱에 실린 ‘진승현씨, 최택곤씨 통해 고위층 가족에도 로비 시도’ 기사는 김대중 대통령 가족을 지칭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이 사용하는 ‘고위층’, ‘여권핵심’은 주로 대통령을 지칭할 때 동원되는 말이다.
보도가 나가자 대통령 가족 K씨는 민주당 장전형 부대변인을 통해 “지난주 초 최씨가 찾아와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돌려 보냈다”고 해명했다. 최씨를 오래 전부터 알고는 있으나 자신은 로비대상이 아니었다는 부인이다.
진승현 게이트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김 대통령 가족에서부터 여당 국회의원,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전직 법무차관, 국정원 차장, 검찰 간부, 금감원 간부 등 거의 모든 권력 실세와 권력기관의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사건에 연루된 의심을 받고 있다.
마치 97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보사건으로 정권이 휘청거릴 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YS는 한보사건 당시 차남인 현철씨를 구속시키는 단안을 내렸다. 청와대와 내각 고위층이 줄줄이 연루돼 ‘식물인간’으로 전락한 YS로서는 아들을 구속시키지 않고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는 게 당시 측근들의 전언이다.
진승현 사건은 한보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1년여전 검찰이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덮었지만 국정원 경제단장이 진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새 나오고, 결국 신광옥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은성 국정원 차장까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권의 도덕성이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검찰은 검찰대로 수사를 은폐, 축소, 왜곡했다는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김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과연 남은 임기를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물음까지 터져 나오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정권의 돌파구는 없는가. 자고나면 정권 실세 이름이 비리 주체로 거명되는 ‘식물’ 상태를 벗어날 탈출구는 없는가.
국민들의 눈은 지금 청와대에 몰려 있다. 김 대통령이 총체적 난국을 돌파할 카드를 내놔야 한다는 준엄한 요구와 명령이 담긴 시선들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공식일정은 한가하기 그지없다. 가족에게 불똥이 튄 어제는 국가인적자원개발을 위한 회의를 주재하고 공석중인 법무차관을 임명한 게 다다.
***청와대 대응 너무 한가해**
국정쇄신, 인적쇄신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검찰에 진승현 사건에 대한 엄정수사를 촉구한 일도 없다. 심하게 말하면 ‘굴러가는 대로 지켜보자’는 식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도덕성을 앞세우며 출범한 현 정권이 지금처럼 ‘비리 덩어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준엄한 조사를 거쳐 일벌백계했다면 지금처럼 비리에 연루된 사람보다 비리 없는 인사를 찾는 게 더 쉽게 된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작년 10월 김 대통령 동생의 아들인 김모씨는 포철 납품업자가 포철 회장실을 방문해 이권을 요구한 현장에 동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참 후에 포항지청에서 김 대통령 조카만 제외하고 다른 연루자들을 모두 구속한 것으로 결말이 났다. 권력형 로비 의혹을 조사했다면 대통령 조카를 가장 먼저 처리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권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김 대통령 처조카인 이영작씨의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 의혹, 처남인 차모씨의 정현준 게이트 연루 의혹, 사돈 관계인 윤모씨의 인천공항 유휴지 개발 사업자 선정 관련 의혹 역시 무혐의로 정리되거나 아예 조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처조카인 이형택씨의 경우는 이용호 게이트 와중에서 보물선 사업을 이용호씨에게 소개했고, 결국 이씨가 이를 빌미로 주가를 조작함으로써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결과를 낳았다. 검찰이 이형택씨를 조사했는지, 안했는지, 하고도 숨기는지 아예 언급조차 없다.
김 대통령이 이같이 친인척 비리에 눈을 감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함으로써 정권내의 양심지수는 떨어질 때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내부에서는 ‘해 먹어도 감방가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게 아닌지 의심을 숨길 수 없다. 만약 김 대통령이 친조카인 김모씨를 단호하게 구속하고 처벌했다면 과연 주변인물들이 하이에나처럼 이권에 눈독을 들였겠는가.
***읍참마속만이 유일한 선택 수단**
김 대통령이 이제 선택할 수단은 하나밖에 없다. YS가 아들을 구속한 것처럼 읍참마속하는 것이다. 대상이 누가 됐건 대통령 주변에 대해 칼을 뽑지 않는 한 정권 전체에 대한 국민들의 비웃음과 비난을 막을 수 없다. 야당과 하위직 공무원에 그토록 냉엄한 정권이 자체 비리를 감싸고 축소 은폐하는 한 김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도, 인권상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YS는 당시 현철씨가 심어놓은 청와대 참모들과 주변 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철씨 구속을 검찰총장에게 불같이 지시했다. 중수부장이 제대로 못한다고 심재륜씨로 바꿔버렸다. 현철씨는 결국 심 중수부장에 의해 구속됐다.
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이미 나와 있다. 썩고 부패한 정권을 핵심부터 손대지 않고는 국민들에게 협력을 당부할 수 없다.
부패 부위를 제거하려면 지금의 사정 진용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많은 국민들의 판단이다. 신승남 검찰 총장의 경우 친동생이 이용호씨로부터 6천만원 이상을 받았고, 다른 간부들 역시 김홍일 의원의 휴가 여행에 동행하거나 김 의원 이름의 돈봉투를 최택곤씨로부터 받았다는 지목을 받고 있다. 국정원도 예외가 아니다. 고위간부들이 간첩은 잡지 않고 벤처를 기웃대며 돈을 긁어모았다는 것은 국사범(國事犯)에 해당된다.
이제 김 대통령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본인이 직접 검찰총장, 국정원장이 되어 수사결과를 일일이 보고 받고 내부 개혁 내용을 하루하루 점검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국민들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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