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새없이 차들이 내달리고 골목마다 저마다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던 3일 저녁, 광화문 네거리에 도시에서 들을 수 없는 새소리, 시냇물소리,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자동차 소음에 묻힌 채 잔잔히 울려 퍼졌다. '초록의 공명을 들어라' 한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이지만, 지율 스님이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1백일 동안 단식을 하고 있는 마당에 자연의 소리는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울려퍼진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2005년 2월5일. 지율스님의 단식이 1백일째 되던 날 저녁 6시반. 남영주 국무총리실 민정수석이 마지막 협상안을 갖고 정토회관을 찾은 그 시각. 지율 스님의 생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순간.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광화문 교보문고 정문 앞에는 지율 스님과 천성산의 도롱뇽을 위해 촛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7백명을 훌쩍 넘어섰다.
계단에 마련된 무대에는 그동안 시민들이 접어온 도롱뇽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도롱뇽 친구들이 접은 도롱뇽은 물론이고, 촛불집회 때 오가는 사람들이 접어준 도롱뇽, 지율스님 단식 소식을 듣고 전국 곳곳에서 접어 보내온 도롱뇽, 정토회 신자들이 보내온 1백8마리, 3백33마리씩 접은 종이 도롱뇽이 한자리에 모여 무려 12만6백마리나 됐다.
<사진1> 도롱뇽
이들은 마지막 지율 스님의 생명을 지키려는 듯 한파 속에서도 함께 노래하고, 시를 낭독하고 기도를 올렸다.
***"우리가 크면 흙이 돼주자. 꽃을 심을 수 있게, 동물들이 밟을 수 있게..."**
이미 수차례 광화문 촛불집회 장소에서 노래를 부른 박지민 어린이 등은 무대에 서서 '좋겠다'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크면 흙이 돼주자. 꽃을 심을 수 있게, 동물들이 밟을 수 있게..."
이어 초록정치연대 모임 회원들은 만화 주제가 '꼬마 자동차 붕붕'에서 '자동차'를 '도롱뇽'으로 바꿔 불렀다. "천성산을 살리려고, 나서는 세상여행…. 꼬마 도롱뇽 붕붕"
'은하철도999'의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는 앵콜까지 받았다. 특히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부분의 가사를 바꿔 부른 "청와대 멈춰라 천성산을 살리자, 청와대 들어라, 지율스님 살리자" 부분은 집회에 참석한 7백여명이 힘주어 따라하며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되는 중에도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어 교보문고 정문앞 공터가 가득차고, 뒷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은 얼음장 같은 바닥에 앉는 '희생'도 기꺼이 감수했다.
저녁 7시30분경에는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출발한 환경정의, 경실련,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시민단체 활동가 '도보단' 40여명이 4시간여만에 도착했고, 본인 스스로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자 전북 부안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삼보일배 순례를 한 문규현 신부도 뒷편에서 촛불을 들고 조용히 집회에 참여했다.
<사진2> 전경
***고속철은 인간이 돌릴 수 있지만, 자연은 인간이 만들지 못해’**
이날 13살짜리 딸과 함께 촛불집회에 온 주부 오윤선씨(41)는 “처음에 지율스님이 단식을 할 때는 그냥 이런저런 사회 갈등의 하나로 가볍게 여겼는데, 단식이 90일이 넘었다는 뉴스를 보고 이렇게 목숨까지 내놓으며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결정적으로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딸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촛불집회에 가자고 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대학생 한동균(22)씨는 “고속철은 사람이 만드는 돈을 들여 돌아갈 수 있지만, 조물주가 만든 위대한 자연과 생명은 억만금을 들여도 인간이 다시 만들 수 없는 것”이라며 “한 비구니승의 목숨을 경시하는 정부가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사진3> 촛불
이날 광화문 촛불집회는 3시간여 동안 진행됐고, 밤이 깊을수록 기온은 계속 떨어졌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끝까지 촛불집회 자리를 지켰다.
이밖에 촛불집회는 광주우체국,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양산 터미널, 대구 백화점, 전주 전북대 구정문, 대전 으능정이거리 등 전국 17개 도심 곳곳에서 진행됐으며, 이러한 간절한 기도가 통한 듯 집회가 끝날 무렵인 이날밤 마침내 지율스님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만든 종이 도롱뇽 12만6백마리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사진4>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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