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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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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영복 고전강독 <1>

제 1강 고전강독 서론

신영복 교수의 중국고전강독은 성공회대학교에서 10여년째 계속되고 있는 명강의 중의 하나다. 프레시안이 오늘부터 연재하는 ‘신영복 고전강독’은 이 강의를 녹취하여 풀어쓴 것이다. 이 원고는 신 교수의 감수를 거쳐서 게재된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했고 그 기간동안 쓴 서간문을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깊고도 아름다운 산문으로 우리 사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편집자

제1강 고전강독 서론

1. 나와 중국고전의 인연

오늘은 나와 중국고전과의 관계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고전강독의 기본적인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 의아해 하는 학생이 있을 것 같아서죠.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저는 현재 우리대학에서 사회과학개론, 정치경제학, 교육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지요. 그리고 제 전공이 경제학이구요. 그런데 왜 중국고전강독 강의를 하고 있는가가 궁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실제로 나한테 그걸 물어본 학생도 있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이 이 강의를 수강한 이유가 도리어 궁금하지요. 컴퓨터정보학과 영어학과 일어학과 신문방송학과 등등 여기 출석부에 적힌 수강신청자 학과가 다양합니다. 다양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예 중국고전과 인연이 없습니다. 중어중국학과 학생들만 제외하구요. 중국고전 나아가서 동양학에 대한 여러분과 나의 관심을 이 시간에 조율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중국고전에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였어요. 그러나 그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었지요.

***감옥에서 눈뜬 관심**

제가 그래도 본격적으로 동양학과 중국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제가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세대가 지향했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제도와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교육적 정서 일반이 서구적 가치일변도였다는 반성이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었다고 기억합니다.

우리의 대학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극도의 패배감과 좌절감속에서 그 유일한 탈출구를 소위 근대기획에서 찾고 있었다는 반성이었어요. 일제식민지 잔재에서부터 해방후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상처 속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지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대안을 성급하게 찾고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소위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시간대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나로서는 어떤 바닥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었어요. 근본적 반성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나요. 소위 근본적 담론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그러한 반성적 정서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지나고 보면 지금보다 도리어 덜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촌 선생을 만나다**

감옥의 옥방 속에 앉아서 무기징역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앞에 놓고 먼저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통하여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소 역설적인 것이긴 하지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여 중국고전은 1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 도덕경’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3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안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동양 고전 몇 권을 1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중국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의 성향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중국고전 공부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옥방에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 李九榮) 선생님이십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 李家源) 박사와 동학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실로 한학의 대가입니다.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감옥에서 한 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는 일대기를 출간하시기도 하였지만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중국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삶의 정직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라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봉건 사회, 일제하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290페이지의 사연**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의 한가지를 예로 들자면, 해방 후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키는 등 해방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그 번역을 옆에서 도우며 공부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중국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같이 강독하자는 교재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여러분이 함께 공부하게 될 중국고전강독은 사실 감옥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인 아까 이야기한 ‘역사는 남북을 가르지 않는다’에 제가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발문을 썼지요. 그런데 그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무척 재미있다고 하는 부분을 소개하지요. 발문의 끝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 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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