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우승으로 끝난 유로 2004의 화두는 단연 전통강호가 존재하지 않는 유럽축구의 평준화였다. 이미 1990년대 이후 국가간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 유럽축구는 이번 대회에서 전통 강호와 신흥 강호가 일대접전을 펼치며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축구전문가들은 지난 1996년 제정된 보스만법(法)의 효과가 유로 2004에서 나타난 유럽축구 평준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 주목된다.
***보스만법의 탄생**
지금까지 진정한 유럽통합에 있어 축구의 역할은 지대했다. 유럽프로축구팀들의 국가대항전 성격을 띤 챔피언스리그(당시 유러피안 컵)는 EEC(유럽경제공동체)설립의 기초를 마련한 로마조약이 체결되기 바로 전 해인 1956년 막을 열었다. 축구가 ‘하나된 유럽’으로 나아가는 전위부대가 된 셈이었다.
이후 클럽팀간의 잦은 경쟁과 교류를 통해 급속도로 발전하던 유럽축구는 1990년대 보스만법이 촉매제가 돼 국가간 경계가 없는 명실상부한 유럽축구의 통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보스만법은 1990년 벨기에 축구선수 장 마르크 보스만이 벨기에 RFC 리에주 클럽팀에서 프랑스의 뒹게르크팀으로 이적하려다 소속 구단의 동의 없이 이적할 수 없다는 규정에 묶이자 선수들에게 불리한 이적규정에 대해 유럽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1995년 유럽사법재판소는 지금까지의 축구선수들의 이적규정이 유럽연합 소속 근로자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한 로마조약에 위배된다고 선언했고 이듬해 UEFA(유럽축구연맹)이 이를 받아들였다. 보스만법의 제정으로 계약만료된 축구선수는 자유롭게 다른 팀을 선택할 수 있게 됐고 EU(유럽연합)소속 선수에 대해선 외국인 선수 보유제한이 적용되지 않게 돼 자연스레 수많은 유럽의 축구 유망주들은 제한없이 명문 프로축구클럽으로 향하게 됐다.
***유럽축구 평준화의 기폭제 보스만법**
수많은 유럽선수들간의 이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유럽인들이 축구를 통해 더욱 동질감을 느끼게 도와준 보스만법의 제정은 유럽의 축구수준 평준화에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이탈리아 세리에 A 등에 속한 명문클럽들은 유럽축구 소국 선수들의 기량향상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는 데 이것이 국제대회에서 '빅 5'로 불리는 전통강호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건 아이러니다”.
전력면에서 크게 평준화를 이룬 이번 유로 2004 대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의 명장 아슨 웽거의 분석이다.
“최근 체코, 그리스, 덴마크 같은 팀의 꽤많은 선수들은 유럽명문클럽에서 뛰고 있기 때문에 이제 아무도 잉글랜드, 이탈리아 같은 팀과 경기할 때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유로 2004 우승팀 그리스의 니콜리디스 골키퍼의 말에서도 이 같은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지금까지 유럽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국가의 선수들도 유명스타들이 대거포진한 빅 리그를 경험해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통의 축구강국들 선수들과의 경기에 익숙해졌으며 '우리도 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현재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프로축구 최상위리그의 선수들 가운데 약 절반은 외국인 선수들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이런 기류가 계속되면 전통적인 유럽축구의 서열은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하며 자국내 유망주가 뛸 자리를 충분히 보장해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숨은 의미있는 UEFA의 자국선수보호 계획안**
UEFA(유럽축구연맹)은 지난 3일 “유럽 클럽팀들은 전체선수를 25명으로 제한하고 최소한 4명은 유소년때부터 현재소속된 클럽에서 뛰던 선수들이여야 하며 또다른 4명은 자국선수여야 한다”는 자국선수보호 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리는 UEFA회의에서 최종결정날 예정인 자국선수보호 계획은 엄청난 자금력으로 스타와 유망주들을 영입하는 소수의 명문클럽에 의해 유럽각국의 프로리그가 좌지우지되는 현상을 막기 위한 방책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계획이 자국내 유망선수를 최대한 보호하고 외국선수들이 쉽게 빅 리그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전통의 유럽축구 강국들의 공통된 위기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유럽축구 강국들이 과거 60~70년대로 회귀해 자국리그를 통해 좀더 많은 자국의 유망선수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몸부림이라는 주장이다.
1996년 효력을 발생한 보스만법이 유럽축구 평준화를 가속화시켰다면 현재 UEFA가 추진하고 있는 자국선수보호 계획이 유럽축구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예의주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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