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독일의 중서부에 위치한 쾰른(Köln)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쾰른은 대성당과 카니발로 유명한 곳이다.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쾰른 대학교는 약 4만50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으로 독일에서 가장 큰 대학 가운데 하나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입학 허가서와 함께 대학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를 하나 배정받았다. 마찬가지로 쾰른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오는 독일 학생들도 처음에는 보통 기숙사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기숙사가 편리하고 월세가 저렴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이용을 6학기까지로 제한했다. 그래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6학기 후에는 이를 비워주고 일반 집을 구해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왜 그래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매 학기 새로이 쾰른 대학을 찾아오는 또 다른 학생들을 위해 비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수긍이 갔다. 3년 정도 생활하면 새로운 주거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그 도시에 익숙해질 테니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쾰른의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른다. 독일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다양한 철도 노선과 쾰른-본 공항을 갖춘 교통의 요지로 세계적 규모의 박람회 등 국제적 행사가 많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기숙사의 기한이 되어 새로운 집을 찾아야 했을 때 집세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게 됐다. 전용 면적이 60~70제곱미터인 일반 주택의 월세가 저렴한 곳이 500~600유로(약 72만~87만 원), 보통 600~800유로(약 87만~116만 원), 자리와 조건이 좋은 곳은 1000유로(약 145만 원)에 육박했다. 기숙사비는 한 달에 337유로(약 49만 원·전기, 난방비 등 부대비용 포함)였는데, 이사를 하게 되면 주거비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돈을 벌지 않는 학생인데(그래서 독일 사회에서는 대학생을 사회적 약자로 취급한다), 집값이 갑자기 몇 배로 오른다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공공 임대 주택(Sozialwohnung, 원래 '사회적 주택'이 정확한 번역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공공 임대 주택으로 번역한다)이 그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공공 임대 주택이란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 시장을 통해서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이다. 주 정부, 종교 단체, 다양한 협동조합이나 재단 등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아 상대적으로 저렴한 집세를 받고 임대하는 주택을 말한다.
이러한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청에서 WBS(Wohnberechtigungsschein,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외국인 학생에게도 그런 기회를 줄까?"하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서류들을 준비해 WBS를 받았다. 또 이것을 가지고 ASG라는 기독교 재단이 관리, 운영하는 공공 임대 주택을 신청했다. 그런데 신청한 지 얼마 안 되어 진짜로 집을 구하게 됐다.
▲ 쾰른의 아파트 주변에 있던 호수. ⓒ조성복 |
다운증후군 딸 둔 할머니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보며
이렇게 얻게 된 집은 쾰른 시 서북쪽에 위치한 10층 미만의 아파트 단지(150가구) 중 하나였는데, 공부를 마칠 때까지 이 집에서 5년 정도 살게 됐다. 전용 면적이 60제곱미터, 집세는 한 달에 386유로(약 56만 원)였다가 나중에 391유로(약 57만 원)까지 인상되었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아파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집을 지속해서 잘 관리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주로 단독이나 연립 주택이 대부분이며,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거나 드문 편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아주 중요시하기 때문에 모여 사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독일의 공공 임대 주택은 한국과 달리 보통 집들과 섞여 있어서 일반적으로 누가 공공 임대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살게 된 아파트 단지는 예외적으로 전체가 공공 임대 주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의 자연환경은 근사했다. 아파트 앞에는 조그만 공원이 있었는데,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숲이 변해가는 모습을 언제든지 창문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뒤편으로는 조그만 산책길이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 20~30분 걸어가면 훨씬 더 큰 숲들이 나오고, 건너편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한 바퀴를 도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단지 옆에는 조그만 쇼핑센터가 있고, 조금 걸어가서 전철을 타면 15분 정도면 중심가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 오래 살면서 같은 라인에 사는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 정도의 한 노부부를 알게 되었다. 특히 할머니는 지나가다가 유일한 동양인으로 눈에 띄는 우리를 볼 때마다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번은 그녀가 독일에 뭐하러 왔느냐고 묻기에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는데, 정치학(Politikwissenschaft)이란 용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사(Dorktor) 공부를 하러 왔다고 했는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는지 어정쩡하게 헤어졌다. 얼마 후 다시 만났을 때, 그 할머니는 드디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았다고 반기면서 "당신, 의사 공부하러 왔지!"하는 것이었다. 흔히 의사를 닥터(doctor)라고 하니 맞는 말이긴 하다.
그 할머니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딸은 결혼하여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예쁜 손녀를 낳았다고 자랑을 했다. 둘째 딸은 아직 같이 살고 있었는데, 키와 덩치는 그녀보다 컸지만 다운증후군으로 보이는 장애가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의 주요 일과 중 하나가 오전 10시쯤 그 딸을 장애 학교 버스가 지나가는 아파트 입구에 데려다 주고, 오후 3시쯤 다시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걸어서 2~3분 거리인데, 할머니와 딸은 그 거리를 움직이는데 최소한 20~3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정치학이나 박사라는 단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다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할머니라면, 직업을 갖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가 아마도 복지제도 덕분에,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는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조성복 박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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