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유지담)가 3일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에 대해 선거법 위반을 인정하고, 공문을 보내 선거중립을 요청키로 결정함에 따라 파문이 일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헌정 사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관위는 노 대통령이 선거법 9조 '공무원의 선거중립' 조항을 위반했으나 선거법 58조의 '사전 선거운동 금지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모호한 결정을 내림에 따라, 조사를 의뢰했던 민주당 등 야당이 "권력 눈치보기"라며 성토하고 나섰다. 반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선관위 결정에 "토론회에서 나온 답변이 왜 문제가 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선관위가 중간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셈이다.
***선관위, '선거 중립' 6대2로 위반 결정**
선관위는 이날 오후 3시부터 7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거친 끝에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결정을 내렸다. 문제가 됐던 발언은 지난 24일 노 대통령이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대통령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밝힌 대목이다.
선관위는 이날 위원들간의 의견차가 크자 결국 표결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유지담 위원장을 제외한 8명의 위원들은 선거법 제58조의 사전 선거운동 여부는 5대3으로 위반이 아니라고, 선거법 9조의 선거중립 위반 여부에 대해선 6대2로 위반이라고 결정내렸다.
이에 따라 선관위는 발표문을 통해 "대통령 취임 1주년 특별회견에서 대통령의 선거관련 발언은 그 전후 문맥과 의미 등을 종합해 볼 때 특정 정당의 지지를 나타내는 취지의 내용으로 볼 수 있으나 정당가입은 물론 광범위한 정치활동이 가능한 대통령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한 것임을 감안할 때 사전선거운동 금지규정에 위반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선관위는 그러나 "대통령은 정치적 활동이 허용된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선거에서 중립의 의무를 가지는 공무원으로서 앞으로 선거에서 중립의무를 지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선관위는 이날 노 대통령에게 공문을 발송했다.
앞서 선관위는 지난해말 대선 1주년 기념행사인 '리벰버 1219' 행사에서 노 대통령의 "시민혁명은 계속되고 있다"는 등 발언에 대해 지난해 12월30일 '공명선거 협조요청'을 한 바 있다.
***청와대, 선관위 결정에 '당혹'**
청와대 윤태영 대변인은 이날 선관위 결정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선관위 유권해석의 취지를 파악해서 수석 보좌관 회의 등을 통해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변인은 유감 표명의 근거를 묻는 질문엔 "일단 오늘은 그 정도로 하자"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청와대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선관위 결정에 내심 적잖이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줄곧 야당에서 제기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주장에 대해 "정략적"이라고 맞서왔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본인도 이날 제주지역 언론과의 합동인터뷰에서 "(야당은) 집중적으로 국회에서 국회의 전 활동 과정을 가지고 대통령을 필요이상 공격하면서 아주 효과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으면서 제가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을 가지고 '탄핵 한다'고 하니까 정말 지금은 언론의 자유가 잘 없다"며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노 대통령은 또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대통령도 정치인인데 내가 누굴 지지하든 왜 시비거냐"면서 "(대통령에게서) 특권을 다 빼앗아 갔으면 정당한 권리는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나라.민주 "선관위원장 사퇴" 우리당 "정치적 결정"**
선관위 결정에 대해 여야 모두 상반된 의미에서 불만을 표시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선관위가 노 대통령 발언의 위법성은 인정하면서도 상응한 조치를 피했다며 선관위원장 퇴진 등을 거론하는 반면, 열린우리당은 선관위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법적 잣대를 들이댔다며 반발했다.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는 선관위가 사전선거운동 위반은 아니라고 결정내린 데 대해 "언어 유희"라고 비난했다. 홍 총무는 "한나라당은 예고했던 대로 노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당내 협의와 다른 야당과의 공조를 타진해 나가겠다"고 이후 대응 방식에 대해 밝혔다.
남경필 의원은 "선관위가 명백히 죄를 인정함에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만큼 선관위원장은 사퇴해야 하고 선관위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수사의뢰나 고발 등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적당히 눈 감아주는 것으로 피해가려 해서는 안되며,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 전원에 대한 탄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운태 사무총장은 "선관위에서 위반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이상 대통령이 다시는 법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탄핵을 포함한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은 선관위 결정에 대해 "과거 공작정치 시대 대통령의 명시적 선거개입을 막기 위해 상례화돼 있던 법적 잣대의 틀을 들이댔다"고 비난했다.
박영선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1991년 대전지법 판례를 보면 언론인터뷰에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한 것은 사전선거운동의 죄책을 물을 수 없다고 돼 있다"면서 "야당이 선관위원장 탄핵을 들먹이면서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한 것은 그들의 비리와 분열을 '탄핵카드'로 덮고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을 해치려는 협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부겸 의원은 이와 달리 "노 대통령은 불필요하게 정국을 긴장시키지 말고 사회적 공론에 귀기울이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며 대통령의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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