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누드집' 파문의 주인공인 이승연씨(36)가 17일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을 찾아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씨는 이날 오후엔 서울 충정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용산구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를 차례로 찾았다.
정작 위안부 할머니들은 1차 누드 촬영분 사진과 필름의 완전폐기를 요구하며 이씨의 사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씨가 "더 이상 촬영을 없을 것"이란 점을 명확히 했으며, 정대협 측에서 제기한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에 18일 오전까지 사진과 동영상을 폐기 처분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서면 요구서를 받으라”는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진과 필름 폐기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누드 소재로서의 '종군 위안부'**
'나눔의 집'을 찾은 이씨에게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76) 할머니는 "우리가 직접 보는 앞에서 사진과 필름을 모두 불태우고 더 이상 제작하지 않겠다는 걸 확실하게 약속하지 않으면 사죄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또 "사진 전부를 없애고 회개한 뒤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역사를 똑바로 알려라. 할머니들에게 또 다시 충격을 주지 말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할머니들이 이씨에게 요구한 것은 "역사를 똑바로 알리라"는 것이었다. '종군 위안부'라는 전쟁 범죄의 피해자가 '성적 존재'로 전환되는 과정에 이씨와 이씨가 제작한 누드화보집이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게 할머니들이 분노한 이유다.
"어떻게 종군위안부를 누드집의 소재로 삼을 수 있냐"는 이씨에 대한 비난을 뒤집어 보면 "종군위안부가 우리사회에서 상품성 있는 누드집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반증이다.
***성폭력 피해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 존재**
환향녀(還鄕女).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적군에게 잡혀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어렵사리 고향에 돌아온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하는 것을 포함해 '정절을 잃은 여성'에 대한 냉대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들의 '성적 경험'은 아무리 비자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향녀는 오늘날 "정조없이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를 뜻하는 '화냥년'이란 욕으로 남았다. 전쟁의 과정에서 적군의 포로로 '성적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경험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보여주는 말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들도 지난 1990년 정대협을 발족시키면서 스스로 나서 증언하기 전까지 이들의 경험은 수십년간 가슴에 묻어야할 '수치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이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처럼 위안부가 몰지각한 연예 기획사에 의해 누드집의 소재로 이용된 것은 여성의 성폭력의 경험을 '성적 경험'으로 인식하는, 더 나아가 '선정적인 이슈'로 바라보는 사회적 맥락에서 가능하다. '강간'은 포르노 영화, 성인 잡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컨셉 중 하나다. 아니, 이미 성인영화 중에 '위안부'를 소재로한 에로물이 있다.
***이승연 사태, 일시적 분노로 그치지 않기를**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성적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녀들의 노력으로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전쟁 피해의 주요 이슈로 제기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승연씨가 누드 화보집을 찍게된 이유로 밝힌 우리 사회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무관심"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이씨의 화보집은 네티즌 등의 '분노'로 결국 무산됐다. 또 지난 16일 이번 사태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요구하는 집회에는 60여명의 취재진이 몰리는 등 뜨거운 사회적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신혜수 정대협 대표는 이날 집회에서 "아시아 여성들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은 아직까지 범죄임을 인정하지 않고, 아시아여성기금 등을 통해 무마하려 한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게 이번 사태로 모아진 위안부 문제의 왜곡에 대한 '분노'가 일시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다. 매주 수요일이면 올해로 12년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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