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분신 박일수씨, 작년말 10년만에 딸과 재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분신 박일수씨, 작년말 10년만에 딸과 재회

[박씨의 기구한 삶] 8년전 뒤늦게 노동현장 들어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빠를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14일 새벽 분신사망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50)씨의 딸 진아(26)씨가 지난해 12월 방송에서 어렵게 아버지를 만나 한 말이다. 하지만 만남의 기쁨도 잠시 이제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다.

박씨의 자살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운데, 박씨가 지난해 12월 방송을 통해 딸과 10년만에 재회했던 사실이 알려져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분신 박일수씨, 작년 12월 방송에서 10년만에 딸 만나**

지난해 말의 일이다.‘그리운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오랫 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게 해주거나 고마웠던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MBC TV의 '꼭 한번 만나고 싶다'(매주 금요일 저녁7시20분 방영)라는 프로그램에서 박씨는 딸 진아(26)씨는 10년 동안 행방을 모르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12일에 방영된 ‘다시 부르는 노래, 아버지’ 방송분에 따르면 박씨와 진아씨가 10년만에 재회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박씨는 첫사랑의 여인과 사랑의 결실인 진아씨를 낳았지만 곧 아내가 집을 떠나갔고, 당시 ‘기타에 미쳐있었다’는 박씨도 진아씨의 할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그 후 진아씨는 할아버지의 호적에 딸로 등재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자라게 됐다. 진아씨는 자라면서“너희 아빠는 할아버지냐?”는 친구들의 놀림 속에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진아씨가 열 살 무렵이던 시절 박씨가 한 번 집에 다녀갔다. 그 때 진아씨는 기타를 치는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할머니가 빚보증을 잘못 선 게 문제가 돼 충격으로 불치병을 얻게 되고, 할아버지도 하루하루를 술로 지새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박일수씨, 기타리스트 꿈에 젊은을 바친 인생**

그러던 중 진아씨는 17세이던 1994년 울산에 아버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렵게 만난 아버지는 진아씨가 그리던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나이트클럽의 무대에서 취객들의 욕을 먹는 ‘사랑의 메아리’라는 밴드의 초라한 멤버였을 뿐이었다.

진아씨는 실망해 아버지에게 모질게 대했고, “17년 전 아빠가 날 버렸듯 나도 아빠를 버리겠다고 결심했다”며 다시는 아빠를 찾지 않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 1995년 6월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바로 이어 7월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결국 진아씨는 혼자가 됐고, 모진 세상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생각만큼 사회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이 과정에 “아빠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진아씨는 “아빠를 한 번 더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고, 방송국에 사연을 접수해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생 많았지? 미안하다"**

스튜디오에서 10년만에 딸을 만난 박씨는 연신 “고생 많았지? 미안하다”며 딸을 보듬어 않았고, 진아씨도 계속 그렇게도 부르고 싶었던 “아빠”라는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박씨는 진아씨에게 “고맙다. 찾아줘서”라는 말을 잊지 않았고, ‘그동안 딸을 찾지 않은 이유’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찾으려고 힘 닿는 데까지 노력을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뒤늦게 하던 일(밴드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을 늦은 나이에 시작하니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딸을 낳고 아내와 헤어진 뒤에도 재혼을 하지 않았으며, 딸을 다시 만나게 돼 “다시 호적 정리를 하겠다”라고 말했다.

방송 말미에 딸이 차려준 밥상을 받고 흐뭇해하던 박씨의 표정을 진아씨는 다시 볼 수 없게 됐고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8년전 힘든 노동의 현장에 뛰어든 '아버지의 노래'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됐다.

박씨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박씨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리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해 방송국에 소포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박씨는 10년 동안 헤어져 있던 딸을 만나게 해준 방송이 사회적 파급력을 깊이 느끼고 방송을 통해 참담한 비정규직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