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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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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135>

좋은 팔자(八字), 나쁜 팔자, 그리고 센 팔자

흔히들 ‘팔자가 세서 이 고생이다’, 혹은 ‘여자가 팔자가 세면 어떻다’, 팔자가 좋니 나쁘니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런가 하면 꽤 오래전에 필자의 친구가 와서 해준 말이 인상깊이 남아있다. 그 친구 말인즉, 가령 조선조 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나 개발독재 과정에서 부정축재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들의 사주팔자를 잘 본다고 알려진 명리전문가들이 살펴보니 다 좋더라는 말을 한다고 하니 명리학이란 것이 도대체 옳고 그름, 선악시비에 대한 판단기준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자신은 이혼했다 하면서 ‘제 팔자가 참 세서 안 좋은 팔자지요?’ 하고 스스로를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아주머니, 팔자가 세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과연 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아주머니 인생길이 어떤지를 알 수 있지요.’ 하고 얘기해주었다.

오늘은 그런 점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세상사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라는 것이 원래 가름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좀처럼 가치(價値)에 대한 얘기를 주저하는 바이지만, 명리학에도 엄연히 정사(正邪)에 대한 기준이 존재한다.

결론부터 꺼내면 좋은 팔자, 나쁜 팔자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세속적 기준에 맞추어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센 팔자라고 해서 나쁜 팔자는 아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그리고 센 것인지 알기 전에, 영화 팬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제임스 딘의 인생에 대해 애기해보자.

반항적이면서도 사랑에 주린 눈빛, 그 고독한 인상으로 겨우 영화 3편에 출연한 것만으로 전 세계의 영원한 청춘 스타로 기억되는 그는 1931년 생으로 1955년에 자동차 사고로 인생을 마감했으니 그 삶을 놓고 좋은 팔자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쁜 팔자라 해야 할 것인가?

그의 생일과 사망한 날을 보면 대단히 기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먼저 태어난 날을 보면 이렇다.

연 신미(辛未)
월 경인(庚寅)
일 갑오(甲午)
시 --

갑목(甲木)이 인월(寅月)에 태어났으니 강한 기질이 있고, 일지에 오화(午火)가 있으니 속으로 강렬한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연과 월에 경금과 신금이 있어 비극적인 삶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사주는 자동차 드라이브를 좋아하지만 언제나 자동차 사고가 일어날 개연성을 안고 있다.

그런 그는 1955년 9월 30일 오후 5시 45분에 경주용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충돌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날의 음양오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 을미(乙未)
월 을유(乙酉)
일 갑오(甲午)
시 계유(癸酉)

얼핏 보아 도저히 흉한 날이라고 판단되지 않는다. 다만 10 분 단위로 시각을 쪼개보면 정사(丁巳)의 시각이다. 따라서 금기운과 화기운이 충돌하고 있고 여기에 시의 계수(癸水)가 각의 정화(丁火)를 누르고 있으니 운전 실수가 있는 시각인데 그것이 그만 대형사고로 연결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기이한 점은 그가 태어난 날이 갑오(甲午)일인데, 사망한 날도 갑오일이라는 점이다. 태어난 날로부터 계산해보면 그는 정확하게 생후 9,000일 만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 점을 놓고 예전에는 그저 우연의 일치이겠지 했는데, 나중에 필자가 명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사람은 태어난 날로부터 9.000일과 18,000일이 되는 날,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죽을 지경에 처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점은 계속 필자의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아무튼 그것은 그렇다 하고, 문제는 제임스 딘의 인생을 평할 때, 그의 팔자를 좋다 해야 할 것인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가볍게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실 팔자가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세속적 기준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떠했든 간에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으면 좋은 팔자라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기준은 좀 추상적인 얘기가 되지만, 사주팔자의 구성을 보아 각 기운들이 서로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상호간에 도와주면서 서로를 이끌어주고 있으면 좋은 사주가 된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발전하는 상이다. 반면, 각 기운들의 구성이 그와 반대이면 좋지 않은 팔자라 할 수 있다. 이는 명리를 보는 전문적인 기준이 된다.

이 두 가지 기준은 약간 다른 것이며 때로는 상충하는 면도 있다. 이에 대해 명리학에는 청(淸)과 탁(濁)이라는 기준이 있다. 맑고 흐리다는 것인데, 맑다는 것은 부귀영화에 상관없이 사람됨이 구차하지 않고 인품이 있다는 뜻이다. 맑지만 기운이 약하면 삶이 고단해도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맑고 기운도 좋으면 그 역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귀를 누리지만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인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귀(富貴)를 함께 바라지만, 사실 부(富)하면 천(賤)하기 쉽고 귀(貴)하면 부(富)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에 이 둘 모두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실은 헛된 망상이기 쉽다.

반면 탁한 팔자란 사람됨이 고상하거나 귀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운에 따라 권세를 누리거나 큰 돈을 모을 수도 있다. 사실 세상에서 부귀를 누리는 사람 중에는 이런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 하겠다.

앞서 필자의 친구가 부정축재로 치부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들이 팔자가 좋다고 하니 명리학에는 도덕윤리도 없냐고 물었을 때는 바로 이 탁하지만 좋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명리학의 고전을 보면, 너무 맑거나 탁한 경우보다는 반청반탁(半淸半濁)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또한 나름의 깊은 지혜를 담은 생각이라 하겠다. 속담에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이른바 ‘센’ 사주팔자에 대해 애기할 차례이다.

팔자가 세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나 주관(主觀)이 상대적으로 강한 경우를 말한다.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니,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과 같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에 맞을지언정 반드시 그 돌이 깨어지라는 법은 없고 정에 맞는 것이 계기가 되어 결과적으로 절차탁마되어 크게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

실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치고 모나지 않은 사람 별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는 모가 났다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있는 사람은 시련을 디디고 마침내 자신의 원하는 바를 달성하는데 있는 것이니 이를 두고 나쁘다 할 순 없는 것이다.

다만, 여성의 경우, 여전히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세상에서 모가 날 경우 인생길이 편하기는 어렵다는 점 역시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선악(善惡)에 관한 말이 나온 김에 잠깐 얘기해보면, 선악시비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사회라는 무리생활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여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끊임없이 이해와 도덕이 상충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개체로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욕구가 있기에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윤리와 도덕, 나아가서 법이 있기에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줄여 말하면, 떡은 하나이고, 입은 두 개이거나, 떡은 하나로도 충분한데, 욕심은 그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 떡을 혼자 먹으면 배는 부르겠지만, 나머지 입은 주려야 하니 못할 노릇이고, 그렇다고 상대를 주고 내가 굶주리자니 그 또한 죽을 지경이다. 이 경우 공평하게 나눠 먹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입이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으니 공평이 무엇인가 하는 개념 정의 역시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는 갈등 구조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청탁(淸濁)얘기가 나왔으니 생각나게 하는 글이 하나 있다. 바로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이다.

권력으로부터 쫓겨난 굴원이 “세상이 온통 다 흐렸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모든 이가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보니 그 바람에 쫓겨났다오.”라고 하자,

어부가 말하길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걸리지가 않아 세상과 함께 잘도 옮아가니, 세상 사람이 다 흙탕물에 뒹굴고 있거늘, 마땅히 그 흙탕물을 휘저어 남처럼 함께 뒤집어쓸 것이며, 모든 이가 취해있거늘, 그 술찌끼를 함께 씹으면서 말술을 들이마시면 될 일이지 무에 그리 깊은 생각과 고고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쫓겨나게 만든단 말이오? ”라고 대답한다.

이에 굴원은 분연히 반박한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

그러다가 비분강개한 굴원은 다시 덧붙여서, “어떻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저 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망정, 어떻게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단 말이오?”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에 굴원의 말을 묵묵히 듣던 어부는 어쩔 수 없음을 한 차례 빙긋 웃음으로 답하고, 뱃전에 노를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는 떠나간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창랑지수청혜, 滄浪之水淸兮)
그 물로 나의 갓끈을 씻는 것이 좋고 (가이탁오영,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창랑지수탁혜, 滄浪之水濁兮)
거기에 나의 발을 씻는 것이 좋으리라. (가이탁오족, 可以濯吾足)

이 얼마나 예리하고 칼 같은 문답인가? 일찍이 필자는 동서고금의 글을 통 털어 사회라는 전체와 한 개인 간에 빚어내는 도덕과 윤리의 모순과 갈등에 대해 이보다 더 날카로운 문답이 오가는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굴원의 핏빛 선명한 인생관과 무명 어부의 세상에 임하는 지혜, 어느 한 쪽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긴장과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부사(漁父詞)를 대학 시절에 접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어느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기에 선악시비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한다. 어부의 노랫말을 외우면서 고뇌하던 젊은 날의 추억만이 그저 아련할 뿐이다.

- 2월 4일은 입춘이다. 들어갈 입(入)이 아니라 설 립(立)해서 입춘(立春)이다. 이제 봄이 들어선다는 뜻이다. 입춘은 이제 봄의 기운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니 갓 시작한 때라 추위는 여전히 매섭다. 동아시아 세계는 원래 입춘부터를 새 해로 잡았으니 우리에게는 세 번의 설날이 있는 셈이다. 양력 1월 1일이 설이고, 음력 1월1일이 설이고, 입춘이 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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