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고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사진1> 문익환 목사
온 몸으로 통일을 부르짖고 스스로 통일을 위한 '실천'에 한 평생을 받친 '늦봄' 고 문익환 목사의 10주기 추모행사 중 묘소 참배식이 17일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모란 추모공원에서 유족인 부인 박용길여사와 자녀들 및 1백50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특히 북측 대표단 7명이 참석해 추모의 의미를 한층 더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예정된 시간보다 약간 늦은 10시20분부터 시작된 이날 추모식에는 북측 추모 대표단의 헌화를 시작으로 이해동 목사가 추모사를 낭독하고 북측 추모단 대표자격으로 참석한 주진구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북한 "1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뜨거운 그 날들을 잊을 수 없다"**
<사진2> 유가족
이해동 목사는 추모사에서 늦봄의 시 <잠꼬대가 아닌 잠꼬대>의 일부를 낭독하며 "문 목사는 당시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글만쓰고 시만 읊으신 분이 아니라 꿈이 아니라 생시처럼 온 몸으로 통일을 위해 사신분"이라고 늦봄을 추억했다.
이 목사는 "문 목사님께서는 우리 역사의 틈새를 연 희망을 심어주셨다"라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서 함께 숨쉬고 못다한 통일의 꿈을 위해 애쓰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북측 추모단장 주진구 부회장도 추모사에서 "문 목사가 평양 방문의 대용단을 내린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뜨거운 그 날들을 잊을 수 없다"라며 "문 목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그리스도와 같이 요단강보다 더 험난한 강을 넘는 용단으로 통일 사도로서 애국의 길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추모사 낭독 뒤에는 문 목사의 평전을 기록한 김형수 시인의 추모시 <예언자> 낭독이 있었으며, 1백50여명의 추모객은 함께 추모의 노래 <그대 오르는 언덕>을 부르기도 했다.
***고인 "통일은 부산역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 달라는 거야"**
이어 문익환 목사의 둘째인 의근씨가 생전의 문 목사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소개해 추모객들의 가슴에 문 목사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의근씨는 문 목사가 생전에 "'역사를 사는 건 말야 온 몸으로 분단 거부하는 거야. 휴전선이 없다고 소리지르는 거야. 광주역, 부산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 달라는 것이라고'라고 종종 말씀하곤 하셨다"며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 기뻐하셨을 것이고, 오늘 이 자리에 북측 조문객이 참석해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대표단은 추모객들을 대신해 대표로 방명록에 '통일 애국의 삶은 길이 빛나리'라고 서명을 했으며, 직접 가져온 '백두산 들쭉술'을 문 목사의 묘소에 올리기도 했다.
문 목사의 유족들과 추모객들은 노래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헌화와 추모의 잔을 올리기도 했으며, 특히 한 60대 여성은 "문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10년이 됐는데도 통일이 안됐습니다"라고 흐느껴 주위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고 장준하 선생의 가족 및 고 전태일, 이한열 열사 등의 유족 등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및 통일단체 회원, 재야 인사, 국회의원, 일반인, 종교인 등이 참석해 문 목사의 생전의 모습에 대해 추억하며 문 목사의 통일에 대한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자리를 가졌다.
<사진3> 북대표단
문 목사에 대한 추모 행사는 이어 자리를 옮겨 '통일의 집'에서 문 목사의 유가족과 북측 대표단이 간담회를 가졌으며, 이날 밤 문화제인 '늦봄 문익환 목사 10주기 평화통일기원의 밤'을 열었다.
'평화통일 기원의 밤'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사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대독하는 한편, 안치환과 자유, 우리나라, 늦봄사랑합창단 등의 공연이 열렸다.
이번 추모행사를 주도한 '늦봄 문익환목사 10주기 행사위원회'는 앞으로 '늦봄 통일방북 15주년 기념행사'를 오는 3월 열고, 늦봄 시비 건립, 사진전. 늦봄 자료 수집 및 출판ㆍCD보급사업 등을 펼칠 계획이다.
늦봄 고 문익환 목사는 1918년 6월1일 만주 북간도 화룡면 명동촌에서 태어나 평생을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돌보는데 노력을 쏟고, 불의에 맞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 섰으며 자신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1994년 1월18일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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