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배운 도둑질이 농사밖에 없는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배운 도둑질이 농사밖에 없는데.."

[현장의 소리] 좌절감과 무기력감만 더한 농민대회

19일 서울 여의도 한강변 둔치 농민대회장에는 7만여명의 농민들이 운집했다.

전국 각지에서 2천여대의 버스를 타고 상경한 농민들에게 '한.칠레FTA'와 'WTO농산물 수입개방'은 임박한 현실적 불안 요소 그 자체였다.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 모여서 서울 구경왔다고 좋아하며, 집회장 여기저기서 너댓명씩 모여 앉아 소주잔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어르신'들의 순박한 표정 속에는 말로 못하는 불안감이 숨어있었다.

<사진1>농민대회장

***"쌀이 힘들어 사과 심었더니 FTA로 사과밭도 갈아엎을 판"**

고 이경해씨의 큰 딸 보람씨가 연단에 올라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힘이 되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동안 물끄러미 보람씨를 바라보고 있던 한 분에게 말을 건넸다. 검고 깊게 패인 주름과 허름한 점퍼 차림에 하얀 운동화가 전형적인 시골 분으로 "농부에게 술은 기계에 치는 기름과 같다"며 한 손에 소주잔을 들고 있었다.

경북 김천에서 올라온 오종명(57)씨. 8년째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오씨는 "한.칠레FTA하면 우리는 다 죽는다"라고 심각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오씨는 벼농사를 짓다가 지난 95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쌀'로는 먹기 힘들겠다고 생각해 비교적 빨리 '전환'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오씨는 과수원으로 업종을 전환하기 위해 전답을 다 처분하고 살고 있는 집을 저당잡아 볕 좋은 밭을 사서 사과나무를 심었다. 농약살포기, 콤바인 등 농기구를 사고 종목 변경하는 데만 빚을 5천만원을 졌다고 한다. 게다가 사과는 4~5년이 지나야 수확이 가능한 농사로, 이제야 수확을 시작했는데 다 갈아엎을 판이라고 앞날을 걱정했다.

오씨는 또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나중에 고향에 내려와 살게 하려고 힘들어도 과수원을 시작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 또 빚을 주겠다니"**

오씨는 이내 정부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오씨는 "사과를 시작한 게 소득도 높고 정부가 나서서 농업 품목 다변환가 뭔가 라며 지원해준다고 해서 했다"라며 "처음에는 연리 5%가 싼 이자라 생각해 큰 맘 먹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빚이 8천만원이 됐다. 그런데 지금 칠레에 과일 개방하고 나더러 또 빚먹고 살라고 그런다"라고 하소연했다.

오씨는 "그나마 사과 딸 때까지 먹고 살기위해 남겨둔 고추밭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버텨왔는데, 올해 냉해와 태풍 '매미'로 (평소의) 반 밖에 수확을 못했다"라며 "또 빚을 지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오씨는 "큰 아들이 서울에서 모신다고 다 정리하고 올라오라 하는데, 아직 여든 노모도 살아계시고, 적어도 막내가 장가갈 때까지는 버텨야 하지 않겠냐"며 "지금 여기서 관두면 자식들에게 빚만 떠넘기게 된다. 내가 진 빚은 내가 처분하고 떠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농민연대의 한 관계자는 "농민대회 참가자 평균 연령이 60세"라고 말할 정도로 농촌사회의 이농 현상에 따른 농업붕괴현상도 예상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30년 이내에 농촌사회가 자연스럽게 붕괴될 지도 모를 일이다. 오씨는 "자신이 마을에서 막내 축에 낀다"라고 말했다.

<사진2>농부들 사진

***"자식놈 농사 물려주고 싶은 부모 누가 있겠나?"**

마을 '청년'회장은 51세의 권정철씨다. 권씨는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앞날이 깜깜한 농사를 누가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냐"고 흥분했다. 권씨는 주로 포도를 하는데, "올해 일조량이 부족해 완전히 망했다"라며 "지금까지 직접 판매했는데, 올해는 화가 나 밭에도 가기 싫어 그냥 헐값에 밭떼기로 넘겼다"라고 말했다.

권씨는 또 "'어떤 사람들은 칠레포도가 맛이 없다'라고 하는데, 한국포도 농가 다 망해서 포도 농사 안지으면 한국포도는 칠레에나 심어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권씨는 "종명이 형은 그래도 자식들 대학도 다 졸업시키고 서울에서 회사도 다니는데 무슨 걱정이 있냐"라며 "우리 아들놈은 머리가 나빠 큰 일"이라고 핀잔을 놓았다. 권씨의 큰 딸은 대학을 포기하고 인근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오후 4시, 농민대회가 마무리 되고 행진이 시작되자 오씨는 권씨에게 "내 아들네 좀 갔다 올께"라며 "서울 소주는 싱거워서 못 먹겠네"라고 한 마디 남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울 올라온 김에 아들에게 주려고 사과 5상자를 관광버스 트렁크에 싣고 왔다는 것이다.

<사진3,4> 마술돋보기, 도장장사(붙임)

여의도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만난 평창에서 온 임숙자(52)씨. 임씨는 "요즘 얘기 들어보니 중국에다 한국 감자랑 고추, 배추 같은 종자 갖다 심어 다시 한국으로 수입한다고 하더라"라고 걱정하며, 그러나 "솔직히 배운 짓이라곤 농사밖에 없는데 그래도 계속해야지 어쩝니까"라고 체념했다.

농민들의 마음에는 '농자지천하지대본(農者之天下之大本)'의 마음이 굳게 박혀 있었다. 전남 영암에서 올라온 김성철(62)씨는 "핸드폰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밥 안 먹고는 못사는 것이다"라며 "농군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겠냐"고 한탄했다.

김씨는 "김옥두 의원(전남 영암.장흥) 하는 것 똑똑히 지켜 볼 것"이라며 "우리 농업 못 지키면 내려올 생각도 말아야 한다"고 기자에게 전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사진5>항의하는 농부

***성난 농심 가로막은 경찰 버스, 또 하나의 좌절**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전국농민대회를 연 농민 7만여명 중 일부는 마포대교를 건너 공덕동으로 향하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국회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이 여의도 마천루 빌딩 숲을 가로질러 여의도 공원을 지나 국회방향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이미 수십대의 전경버스가 범퍼와 범퍼를 맞대는 방식으로 2중 3중 빈틈없이 가두행진을 가로막았다.

이에 3백여명의 흥분한 농민들이 전경버스를 흔들고 경찰버스 위의 전경들에게 깃발을 휘두르는 등 가두행진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버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송차에서 가두행진을 지휘하던 사회자는 "이성을 찾아야 합니다"라며 일부 농민들의 과격한 행동을 제지하려 애쓰기도 했으나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사진6> 불탄 버스, 물대포(붙임)

전경버스를 흔드는 농민들의 흥분은 더욱더 높아져갔다. 일부 농민들은 어디선가 구해온 삽으로 전경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타이어의 바람을 빼고, 불을 지르는 등 시위는 격렬해졌다. 한 해 피땀흘려 농사지은 사과와 귤을 던지기도 했다.

또한 농민들이 버스에 불을 지르고 줄을 매달아 전복시키려는 등 시위가 점점 더 과격해지자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전의경 병력을 투입해 여의도 공원 안쪽으로 농민들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여러명의 농민들이 쓰러져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과격한 행동을 하는 농민들은 2백여명 안팎일 뿐 어둠이 내리자 대부분의 농민들은 공원 낮은 울타리 안쪽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싸움 구경을 하거나 집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절해서 올라온 관광버스 기사가 "어서 내려가자"라며 마을 주민들을 찾고 다니기도 했다. 이들은 절대 '조직된' 폭력분자들이 아니었다.

<사진7,8>끌려가는 농부, 전경앞 농부(붙임)

***"니들은 쌀 안 먹고 사냐?"**

물대포 세례에 흠뻑 젖은 농민들은 허탈하고 분한 마음에 전의경들에게 "니들은 쌀 안 먹고 사냐? 우리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며 하소연도 하고, "니들은 애미 애비도 없냐?"라며 항의도 하고, 어떤 농민들은 "아들 같은 전경들 나무라지 맙시다"라고 말리기도 했다.

국회 앞을 철통같이 막고 있는 전경버스와 경찰들은 농민들에게 또 하나의 '넘지 못할' 좌절의 표상이었고, 물대포에 흠뻑 젖어 순식간에 흩어져 버린 마을 사람들은 무력감의 증거였다.

게다가 시위를 하는 동안 여의도 금융가에서 쏟아져 나와 꽉 막힌 여의도 도로사정에 찡그리는 말끔한 차림의 어느 세련된 여성 직장인이 내 뱉은 "또 데모야"라는 말 한마디가 옆에 타고 올라온 관광버스를 못 찾아 헤매고 있는'어르신'들에게 들릴까 매우 초조했다.

<사진9>마천루 야경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