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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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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116>

팔진도(八陣圖)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삼국지연의를 읽은 이 중에 팔진도란 어휘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오늘은 이 팔진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소설 속의 팔진도는 물론 허구이지만, 이는 주역과 음양 오행 등과 연관된 얘기들이 많기 때문에 소개하게 되었다.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유비를 격파한 오나라의 대장 육손이 촉의 패잔병을 추격하다가, 제갈량이 미리 설치해 놓은 팔진도에 빠져들어 죽을 고생을 하는 얘기가 나온다. 신산 제갈량답게 훗날 쓰임이 있을 것이라 여겨 큰돌들을 가져다가 진을 쳐 놓았던 것이다.

책의 본문을 보면 이런 식이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전방에 촉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복포 일대에 돌산이 팔구십 개 흩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육손이 기이하게 여겨 몸소 수십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전방에 있는 산의 경사면에 올라 관찰했더니, 사방 팔방에 돌더미가 흩어져 있고 각 방위마다 입구가 있어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에 육손은 더욱 의아해져서 석진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려 하니 갑자기 미친 바람이 일면서 모래와 돌이 천지를 뒤덮을 듯 휘날리는 것이었다. 돌들이 칼날처럼 우뚝 솟고, 모래나 흙이 산처럼 겹겹이 쌓이고, 성난 파도가 으르렁대며 천군만마와 같이 습격해 왔다. 육손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제갈량의 계략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육손이 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겨우 탈출할 수가 있었다. 육손은 그 때서야 석진의 형태가 팔진도라는 것을 알았다.≫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랬겠지만, 필자 역시 어렸을 적에 제갈량의 팔진도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게 여겨져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아는 분을 통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진법(陣法)’이라는 책을 열람하기도 했었지만, 그리 신기한 내용이 아니어서 실망한 적도 있다.

훗날 삼국지 정사를 보니 애당초 육손은 위나라의 침공을 막느라, 직접 촉군을 추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팔진법에 관해 연구한 결과 그런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진법은 그저 소설상의 허구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 소개된 제갈량의 팔진도는 그 신기막측한 면으로 해서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 멀리는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팔진도의 영향은 민간의 무속신앙에까지 파고들어 귀신을 쫓아내는 부적으로 쓰였는가 하면, 임진왜란 때의 일등공신 유성룡의 전설적인 일화에도 담겨져 있다. 유성룡이 안동 지방에 팔진도를 펼쳤기 때문에 왜적의 화를 입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래와 판소리 가사에도 전해져 온다. 홍길동전에도 길동이 둔갑법을 펼쳐서 살신의 화를 면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둔갑법이란 것이 팔진도의 원리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소설 속에서 팔진도를 조화를 부리는 신기한 진법으로 묘사한 탓에 훗날 팔진도는 방술이나 도술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오늘날에도 둔갑법을 써서 팔진도를 펼치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한다고 광고를 하는 도인들도 있다. 물론 필자는 그런 말을 믿지 않지만, 그런 신기한 일이나 도닦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전히 흔들어놓고 있다.

그러면 팔진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팔진법(八陣法) 또는 팔진도(八陣圖)는 그 유래가 중국 고대의 주 왕조에서 실시한 정전법(井田法)에 있다. 그러면 정전법이란 어떤 것이지 알아보자.

<그림1>

그림에서 보듯이 정전법이란 1리 4방(1리는 400m)의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주위의 8구획은 8호(戶)의 집에서 각기 사전(私田)으로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전(公田)으로서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정부에 바치는 조세로 할당하였다. 결국 여덟 집이 아홉을 생산하여 1/9을 바치니 비율로 따지면 11%가 된다. 이는 10%세율과 거의 같은 것이다.

네모진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누어 9개의 구역으로 만들지 않고, 16등분할 수도 있고, 25등분할 수도 있건만, 9개의 구역으로 한 것은 간편함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고대인들의 숫자 관념에 있어 ‘9’라는 수는 가장 큰 수로서 수의 끝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앙 정부는 그보다 더 큰 수를 이미 다루고 있었겠지만, 농사짓는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9라는 수는 긍극의 수였던 것이다.

9라는 수에 대한 관념은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아홉수가 되면 안 좋은 일이 생기기 쉽다는 일종의 민간 금기 신앙, 즉 터부로 여전히 살아있다.

주(周)대의 정전법은 그 기원이 사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고대 중국 최초의 왕조였던 하(夏)나라가 천하를 우물 정(井)자에 따라 9개의 주로 나누고 있었으니, 이미 오래 전부터 토지 구획을 9개로 나누던 방법이 채택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리고 9개로 행정 구역을 나누는 방식은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니 전국을 8 도로 나누고 가운데에 서울을 둔 방식 역시 일종의 정전법적인 사상이라 하겠다.

그리고 중국의 프톨레마이오스라 불리기도 하며,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오행 사상을 주장한 동이족 출신의 추연은 중국이 사실은 세계 전체 면적의 81분의 1 크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당시의 세계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었다. 이는 그들이 쓰던 9라는 숫자에 다시 9를 곱한 숫자이다. 즉 추연의 세계관은 당시의 것을 81 배로 확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군대가 진을 치는 법 역시 정전법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가운데에 장수가 있는 중군(中軍)을 두고, 동서남북의 사정(四正)과 북동, 북서, 남동, 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 바로 팔진법인 것이다. 이 같은 팔진법은 9개의 구역을 궁(宮)이라 해서 구궁진(九宮陣)이라 부르기도 한다. 팔진이나 구궁진이나 아무튼 고래로부터 내려오던 방식으로서 이상할 것도 없으며,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생겨났겠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 쓰던 군의 배치 방법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신비한 색채가 가미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바로 마방진(魔方陣, Magic Square)이라 부르는 수학적 개념의 등장이다. 아마 독자분들도 어려서 마방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마방진의 기원은 동양학에 조금 조예가 있다는 분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저 유명한 하도낙서(河圖洛書) 중에 바로 하도(河圖)에서 유래한다.

<그림2>

하도를 간단히 정리해서 마방진으로 나타낸 것이다. 살펴보면 정전법의 모양 그대로 9개의 칸이 있고 그 속에는 1부터 9까지 9개의 숫자가 들어가 있는데, 재미난 것은 어느 방향에서 합쳐도 늘 15라는 숫자가 얻어진다는 점이다.

하도가 만들어진 것은 대략 기원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마방진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수학적 지식에 해당되었기에 나중에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색채가 곁들여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마방진에 들어가는 숫자는 1에서 9까지 9개의 숫자인데, 합치면 모두 45가 된다. 이 45를 어떤 계(field) 속에 존재하는 에너지 총량이라 정의한다면, 9개의 칸에 5씩 균등분배하지 않고, 일종의 특수한 요령-마방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일견 불규칙하게 배치했지만, 어느 방향에서 합쳐도 에너지양이 15가 되고 전체는 45가 되는 것이 바로 마방진이고 하도인 것이다.

이 하도는 전설상의 복희(伏羲)가 황하(黃河)에서 얻은 그림이라고 하며, 복희는 이것으로 주역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하도나 낙서 모두 만들어진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며, 우리가 흔히 도참(圖讖)이라 말하는 것의 원조에 해당된다.

도참에 해당되는 책은 나중에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도는 바로 그림을 말하는 것이니 하도낙서가 원조이며, 참은 참위설이란 말의 참에 해당된다. 최근 유행하는 예언서 ‘송하비결’ 이나 오래 전부터 있던 정감록 같은 책이 모두 참위서인 것이다. (여기서 참위서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문제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정전법에서 유래하는 팔진법이 마방진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비화되었다는 것이다. 군사가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느 방향으로 쳐들어가도 결국은 15개의 부대를 격파해야만 그 진을 돌파할 수 있으니 대단히 신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결과 부대가 배치된 구역 사이의 통로(이를 門이라 한다)가 여덟 개가 있는데, 어떤 문으로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고, 어떤 문은 살아서 나올 수 있으니 이를 사문(死門) 또는 생문(生門)이라는 개념이 주어지게 되었다. 또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지만 결국 놀라고 혼나기만 할 뿐 살아나올 수 있는 문도 있고, 처음에는 쉬워 보이지만 결국 잡혀서 포로가 되어야 하는 문도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팔문금쇄진으로서 유비의 책사인 서서가 조조의 장수 조인이 펼친 진법의 약점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장면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런데 실제로 제갈량이나 여러 병법가들이 마방진의 원리에 따라 팔진을 펼쳤던 것일까?

필자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진법에 관한 적지 않은 서적들을 섭렵했으며, 더러 중국의 고대군사 역사가들과도 얘기를 나눈 적도 있다.

결론인 즉, 고대 병법가들이 마방진의 원리를 실제 작전에 응용하려고 많은 시도를 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배치하려면 지형적 제약을 많이 받기 마련인데, 어떤 지형, 가령 낮은 고지 같은 곳에는 전체 군사 중에서 1/45을 배치하게 되면 마방진의 원리에 따라 그 후방의 중군은 5/45, 그 더 후방의 개활지에는 9/45를 배치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팔진법이라 하지만, 그 실제의 모습은 결국 지형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기에 그 모습이 일관되지는 않으며 다양하고 숱한 변형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갈량의 팔진법은 실제 상황에 부합하도록 상당한 연구가 곁들여졌던 것이고, 이를 나중에 사마의가 그 진형의 배치도를 보고 감탄했다는 것은 정사에도 나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관계없이 나관중이 소설에서 제갈량의 팔진도를 신비스러운 것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숱한 민간 전설이 생겨났으며, 방술가들도 그에 맞추어 팔진도나 둔갑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실제 가능하다고 유포시켜 왔던 것이니, 이 또한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라 할 것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현재 제갈량의 팔진도 유적이라고 알려진 곳이 몇 군데 있다. 중국 사천성의 봉절, 신도, 쌍류와 섬서의 한중 면현의 정군산이 그 곳으로서 제갈량이 팔진을 치고 군사를 조련한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지만, 일부 연구에 의하면 팔진도의 유적이 사실은 고대 거석문화의 유적이라는 반대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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